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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 버린 한국의 고대 역사 ( 古代 歷史 )

        배달국 ( 또는 고조선 ) 의 피라미드

          중국의 서안 (장안) 에 있는 여러개의 피라미드가 있는데
          1963년 중국정부에서는 그중에서 가장 큰 것 3개를 지정하여 발굴하였는데 ,
          그중에서 가장 큰 것을 진시황의 무덤이라고 생각하였다.

          40여명의 발굴단을 동원하여 대대적인 발굴을 시작한 3일째 되는날
          거대한 피라미드 속을 들어가서 유물들을 조사하게 되었다.

  
<< 독일인 고고학자인 하우스 돌프가 찍은 사진 >>

          거대 한 벽돌 피라밋 지하입구로 들어가자 약 3~5층으로 석실이 나뉘어져 있었고,
          석실 내부의 공간에는 벽화, 그림, 알수 없는 그림문자들이 있었다고 한다.
          또 수많은 유물들도 나왔는데 청동검, 칼, 창등 의 유물들이 모두 동이족들이 사용하던 유물들이었다.

          여기서 나온 엄청난 유물들이 중국의 황하족의 유물이 아니고 조선족의 유물임을 알게된 중국당국은
          발굴에 참가한 모든 발굴단원들에게 이곳에서 본것에 대한 비밀을 지키겠다는 서약서를 작성하고
          발굴작업은 중단되었다.
          그후 중국당국에서는 어느누구도 이 피라미드 근처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접근 금지령을 내리고
          공안당국에서 경비를 하고 있는 것이다.

          BC 221년에 중국 최초의 통일국가를 건설하고 BC 206년에 죽은 진시황 (秦始皇)의 무덤인줄 알았던
          이 피라미드의
          건축 연도를 측정해보니까 진시황 (秦始皇) 보다 훨씬 이전인
          BC 4000 년 경에 만들어 진 것으로 판명되었고
          또 여기서 나온 유물들은 동이족(東夷族)의 유물이었다.

          BC 4000 년에는
          중국의 삼황오제 중에서 가장 먼저인 태호 복희(BC3528∼BC3413) 때 보다도 앞선 시대인데  

          배달국(倍達國)의 환웅(桓雄) 임금님이 나라를 다스리던 배달국의 시대이다.

          우리나라의 상고 시대를 보면
          BC 7199년 ~ BC 3899년 까지 : 환인(桓因) 임금님들이 다스리던 환국(桓國) 시대
          BC 3898년 ~ BC 2333년 까지 : 환웅(桓雄) 임금님들이 나라를 다스리던 배달국(倍達國) 시대
          BC 2333년 ~ BC 238년 까지 : 단군(檀君) 임금님들이 나라를 다스리던 고조선(古朝鮮) 시대

          참고 : 배달국 시대 역사  /  고조선 시대 역사

          피라미드는 세계적으로 이집트에 있고 마야인들이 만든 피라미드는 멕시코에 있는데
          중국 한가운데 동이족이 건설한 피라미드가 가장 오래된 것이다.
          그런데 3곳의 피라미드의 크기도 비슷하고 축조 기술이 거의 동일한 기술로 만들어져있다.

          참고 : 마야인들이 만든 피라미드

          지금의 중국땅에서 우리민족이 건설한 피라미드는 BC 4000 년경에 만들어 졌고
          80여개의 이집트 피라미드중에서 가장 오래된 피라미드는 BC 2700 년경에 만들어 졌고
          마야인들이 멕시코 땅에서 건설한 피라미드는 AD 300 ~ AD 900 년 경에 만들어 졌다.

          중국의 입장에서 보면 억장이 무너지는 유적지이고 유물들 이었다.
          중국의 변방도 아닌 중국 한가운데에서,,,,
          자기들 역사상 가장 웃대라고 하는 진시황의 무덤인줄 알았는데,,,진시황보다 4000 년전의 무덤이라니,,,,
          그리고 그 무덤에서는 자신들의 유물보다 2000 년 앞선 청동기 문화의 유물이 다량 나왔으니,,,,
          그것도 자신들의 조상이 아닌 동이족(東夷族)의 무덤이라니,,,,,,
          그래서 더 이상 무덤을 발굴하지 않고 그냥 덮어 버린 것이다,

          유적지와 유물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중국이 거짓말(동북공정) 하도록 내 버려두어라,,,, 곧 들통날테니,,,,


        배달국 14대 환웅 임금이었던 치우 천황의 무덤

          중국의 역사서인 사마천의 사기에 보면
          치우(蚩尤)천자의 무덤은 산동성 동평군 수장현(東平郡 壽張縣)에 있다고 하였다.

          또 중국 "수장현지(壽張縣志)"에 나와있는 치우천자의 무덤에 대한 기록은 다음과 같다.
          "치우총"은 현(수장현청)의 남쪽 오십리에 있고, 한의 "장자방묘"는 현의 남쪽 육십리에 있다.

           중국에 살고 있는 조선족분들이 이름만 전해지고 형체가 없어진 치우(蚩尤)천자의 무덤의 위치를 찾아서
          복원 작업까지 마쳤다.

          참고 : 배달국 치우천황의 무덤의 위치

          중국땅 한가운데인 산동성 동평에 배달국의 천황이었던 임금의 무덤이 있고,,,
          또 치우천황(蚩尤天皇)의 부인인 "견비" 의 무덤도 가까운 거야라는 곳에 있는데,,
          치우 천황과 전쟁을 했다는 중국의 황제(黃帝)인 헌원(軒轅)의 무덤은 변방인 황릉에 위치하고 있다.


<< 치우천황의 무덤을 복원공사한 후,,,,  치우총 비석 >>

          무슨 설명이 더 필요한가 ?
          이런대도 중국은 탁록전투에서 중국의 황제(黃帝)인 헌원(軒轅)이 치우천황(蚩尤天皇)을 물리쳤다고 할 것인가 ?
          중국의 황제(黃帝)인 헌원(軒轅)은
          자신이 태어난 산동성 고향에 묻히지 못하고 척박한 변방에서 죽고 그곳에 묻히게 된 것이다.

          탁록전투에서 이긴 치우천황(蚩尤天皇)은
          중국 한가운데인 하남성 진류 (陳留) -- 지금의 회양(淮陽) 에서 중국을 통치하다가 죽게 되자
          부인의 무덤과 함께 당시 중국을 통치하던 장소에서 멀지 않은 산동성 동평에 묻힌 것이다.

          이런 유적이 나오니까 중국 당국은 골치가 아픈 것이다
          동이족(東夷族) 임금의 무덤이 중국 한가운데 있느니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
          골치 아프니까 들고 나온 것이 동북공정,,,,, 치우천황도 중국 사람이었다,,,, ㅎㅎㅎㅎ,,,,


        한반도의 고인돌

          옛날 고조선이 지배하던 지역에는 무수히 많은 고인돌이 만들어져 있다.
          즉 세계의 고인돌의 40%가 한반도에 분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청동기 시대의 대표적인 유물에 대한 고고학적 연구가 부족하여
          고인돌이 아직도 빛을 발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참고 : 한반도의 고인돌

          고인돌에 대한 연구가 활발히 이루어지면 한국의 고대사는 저절로 해결될 것이다.

          말없이 서서
          거짓말하는 중국과 일본을 쳐다보고,,,
          한없이 당하기만 하는 한민족을 쳐다보고,,,
          역사의 준엄한 심판을 내릴 말없는 고인돌,,,,고인돌,,,고인돌,,,


        중국에서 벼농사를 가장 먼저 시작했다 ???

          원시사회에서 농경사회로 넘어가는 과정을 알수 있는 유물

            중동 지역에서는 BC 8,000 년 경부터 보리, 밀, 콩등을 재배하기 시작했으며,
            개, 양, 염소, 소 등의 가축을 길렀다.

            멕시코 지역에서는 BC 5,000 년 경부터 야생 옥수수인 테오신테(teosinte)를 비롯하여
            콩, 호박 아보카도등을 재배하기 시작한다.

            중국에서의 본격적인 농경사회는 BC 7,000 년 경부터 이라고 한다.

            일본에서의 농경사회의 유물이 출토된것은 BC 300 년 경부터 이다.


          고대 한국의 벼농사에 대한 문헌 기록

            중국의 역사책 --- 삼국지 위지 동이전 ( 三國志 魏志 東夷傳 )

              변한과 진한 에서는 오곡과 벼농사를 재배하였다


            한국의 역사책 ---- 삼국사기 ( 三國史記 )

              서기 32년 ( 백제 2대 문루왕(文婁王) 6년 ) 에
              왕이 직접 명을 내려 벼를 심을 도전(稻田: 논)을 만들게 하였다


          중국의 농경사회 유물

            중국에서 농경사회( 구석기 시대 말기 ~ 신석기 시대 초기 )의 유물인 볍씨가 발굴된 곳은 10 여곳이나 된다.
            대부분의 유적지에서는 BC 3,000 ~ BC 8,000 년 경의 볍씨 또는 탄화미( 불탄 쌀)가 출토되었다.

            용사장 유적지에서는 4,000 여개의 불에 탄 쌀 ( 탄화미 ) 이 발견되었는데
            연대를 측정해본 결과 BC 3,000 ~ BC 5,000 년 경의 유물이었다.
            특히 다량으로 출토된 탄화미는
            이 지역에서 적어도 BC.5,000 년경에 이미 벼를 재배하여 식량으로 사용하였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중국 양자강 유역에 있는 옥섬암(玉蟾岩) 유적지에서 볍씨 4개가 발견되었다.
            이 볍씨를 감정해 본 결과 BC 8,000년 때의 볍씨임이 확인 되었고,
            이 볍씨는 사람이 가꾸지 않는 야생상태의 특징도 있었지만 사람이 재배한 볍씨의 특징도 가지고 있었다.

            중국 황하(黃河)강 유역의 강서(江西)성 만년현에 있는
            작은 산속에 있는 석회용암 동굴유적( 선인동 유적지 )을 1997년에 발굴하였는데
            이 곳에서 다량의 동물뼈, 인골, 석기, 골각기, 조개껍질들이 출토되었는데, 볍씨도 함께 출토 되었다.
            이 볍씨는 BC 1만 500 년경의 볍씨로 판정되어서
            한동안 ( 2002년까지 )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볍씨로 인증 받아 왔었다.


          한국에서 발견된 볍씨

            저가 중학교, 고등학교를 다닐때 ( 1970년대 ) 학교에서 배운 것은
            일제 시대때였던 1920년대 김해 패총에서 나온 유물을 보고
            우리나라의 벼농사는 BC 100 년경 부터 시작 되었다고 배웠다.
            그러면서 BC 300 년경부터 벼농사를 시작한 일본의 벼농사 기술이 유입되었다고 배웠다.--- 엉터리 교육

            하지만 1980년대 때부터 경기도 여주군 흔암리,,,,,평양시 삼석구 남경,,,,, 충남 부여 송국리 등의 유적지에서
            BC 1,000 년경의 불에 탄 쌀 (탄화미)이 출토됨으로써
            한국의 벼농사의 시작은 청동기 시대때부터라고 했고,,,,,
            다시 1990년대때에는 경기도 김포시 가현리,,,,,, 경기도 고양군 일산 가와지유적지 등에서
            BC 2,000 경의 불에 탄 쌀 (탄화미)이 출토됨으로써
            한국의 벼농사의 시작은 신석기 새대 후반이라고 했었다.

            1998년과 2001년에 공단을 조성하기 위해 충북 청원군 옥산면 소로리 일대의 유적지를 발굴했는데
            이곳에서 볍씨 59개가 출토 되었다.
            이 볍씨를 감정해본 결과 BC 1만 5,000 년경의 볍씨(고대벼와 유사한 벼)였었다.
            2003년 미국 워싱턴에서 열린 제5회 세계고고학대회에서 소개되어
            세계적 언론매체들이 그 내용을 특집으로 보도하면서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볍씨로 인증 받았다.

            그래서 우리나라가 세상에서 가장 먼저 벼농사를 시작했다는 것이 증명된 것이다.


        중국이 자랑하는 세계 4대 발명품 ( 종이, 화약, 나침반, 인쇄술 )

          중국이 세계 최초로 발명했다는 세계 4대 발명품,
          북경 올림픽 개막식에서 이런것을 소재로 온세상에 자랑했던 사실이 기억난다.

          이렇게 자랑하는 중국의 4대 발명품에 대해서 알아 보면
          이 발명품들이 누가 처음에 만든 것인지 금방 알수 있다.


          종이

            종이는 서기 105년에
            중국의 후한(後漢 : 25 년 ~ 220 년) 시대의 환관이었던 채륜(蔡倫)에 의해 발명되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최근의 고고학 연구 결과로는 적어도 그보다 300년 전인 ( BC 200 년 ) 에도
            종이와 유사한 형태의 것들이 많이 발굴되어 채륜의 종이 발명설은 그 의미를 잃어가고 있다.

            채륜(蔡倫)시대 훨씬 이전부터 원시적인 형태이기는 하지만
            대마와 넝마를 주원료로 한 종이가 만들어져 사용되었고 점차적으로 개량되어 왔다.

            간단한 예를들면
            중국의 전한(前漢 : BC 206 년 ~ AD 8 년 )시대 사람이었던 사마천 (司馬遷 : BC 145년 ~ BC 86년)이
            중국 최초의 역사서인 "사기(史記)" 를 저술하였다.
            방대한 역사책을 종이가 없으면 만들어지기 어려웠을 것이다.

            종이 만드는 기술은 중국에서 중동으로,,, 또 중동에서 유럽으로 전파되었다.

            기록에 따르면 종이를 만드는 기술은
            중국의 당(唐)나라 군대와 중동의 사라센 군대 사이에 벌어진 탈라스 전투 ( 751년 ) 에서
            사라센군대에 패배하고 포로로 잡힌 당(唐)나라 제지공(製紙工)에 의해 중동과 유럽에 전파 되었다고 한다.

            고구려 ( BC 58년 ~ 668 년 ) 의 종이 만드는 기술은 매우 뛰어났다.
            당(唐) 나라 ( 618 년 ~ 907 년 ) 초기 시대의 중국사람들은
            고구려의 종이 ( 만지(蠻紙) 라고 불렀음 )를 대량으로 수입하여 사용하였다는 문헌의 기록들이 많다.

            고구려의 승려 담징(曇徵)이 625년경에 일본에 종이 만드는 기술을 전파하였다.

            고구려의 질 좋은 종이는 삼을 원료로 한 마지(麻紙)였는데,
            아시아에서 중동과 유럽으로 전파된 종이기술 역시 마지(麻紙)의 생산 기술이었으며,
            탈라스 전투 이후 중동지역에서 생산된 종이 역시 마지(麻紙)였다.

            낙랑국 ( 樂浪國 : BC 250 년경 ~ AD 37 년 ) 의 옛 무덤인 채협총( 축조 연대 BC 108 년 )을 발굴하였는데
            그곳에서 닥나무 로 만든 종이 뭉치가 발굴되었다.
            이것은 중국이 내세우는 채륜(蔡倫)시대 훨씬 이전의 종이인 것이다.

            서기 285년에 백제의 왕인(王仁) 박사가 논어 등이 쓰인 책을 일본에 전달했으니,
            이 시기 백제는 벌써 종이를 만들었다는 증거이다.

            종이를 부를때
            우리나라의 종이는 한지(韓紙)라고 하고,,,,
            중국의 종이는 화지(華紙)라고 하며
            일본의 종이는 화지(和紙)라고 한다.

            여기에서 한지(韓紙)의 한(韓)은 우리나라를 가르키는 말이다.


          화약

            초기의 화약은 황, 초석, 목탄을 혼합해서 만든 흑색 화약이었다

            중국의 당(唐)나라 ( 618 년 ~ 907 년 ) 때의 손사막(孫思邈 : 581 년 ~ 682 년 ) 이라는 의학자가
            초석과 황의 혼합물이 격렬하게 연소한다는 것을 알아내고
            거기에 목탄을 부가해서 흑색화약을 발명해냈다.

            화약이 전쟁에 사용된 것은 北宋 ( 960 년 ∼ 1127 년 ) 시대 때 부터이었다.
            당시의 화기(火器)는 화살에 화약을 매달아 공격물에 불을 지르게 하는 방법을 주로 사용하였으나,
            몽고군이 중국을 지배하였던 원(元) 나라 (1271 년 ~ 1368년 ) 시대때
            화약의 힘으로 화살과 폭발물을 날려보내는 화포가 발명되어 유럽까지 침공하였으며,
            이런 화약 기술을 배운 유럽에서는 15세기에 대포와 소총 형태의 화승총(火繩銃)을 만들었다.

            한국에서는 고려말기에 최무선(崔茂宣 : 1325년 ~ 1395년 )에 의해 1370년 화약 제조에 성공했다.
            당시 세계에서 화약을 만들 수 있는 나라는 오직 몽고의 원(元) 나라 밖에 없었으며,
            중국인들은 화약 제조방법을 절대 나라 밖으로 새나가지 않도록 극비에 부쳤으나,
            최무선이 오랫동인 정성을 다한 연구와 노력끝에 화약을 발명해내
            우리나라 ( 당시 고려 )를 제 2의 화약 무기 보유국으로 만들어 놓았다,

            최무선의 화약제조법은 그의 아들 최해산(崔海山)에 의하여 계승되었다.
            특히 조선시대의 세종 30년(1448년) 에 만든 신기전은 당시 세계 최첨단의 로켓병기로써
            왜구의 섬멸과 서북 변경의 개척에 많이 사용되었다.


          나침반(羅針盤)

            자석을 가만히 두면 남(南)과 북(北)쪽을 가르킨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그래서 이런 자석을 지남철(指南鐵)이라고 불렀다.
            나침반(羅針盤)은 자석의 이러한 성질을 이용하여 남북 ( S-N )방향을 알아 낼수 있도록
            여러가지 형태로 제작되었는데 주로 배를 타고 멀리 항해하는데 많이 이용되었다.

            문헌에 나오는 중국의 나침반은 송(宋)나라 ( 北宋 : 960 년 ∼ 1127 년 ) 시대에
            심괄(沈括 : 1031년 ~ 1095년)이라는 학자가 처음으로 만들었다.

            바다를 항해할 때 자침을 사용한 것은 심괄(沈括)의 시대 이후이다.
            중국을 왕래한던 아랍의 선원이 자침을 항해에 사용하는 기술을 유럽에 전달하였으며,
            1302년 이탈리아 사람에 의해 오늘날의 자기 나침반이 제작되었다.

            우리나라 삼국사기를 보면
            문무왕 9년(669년) 1월에 중국 당(唐)나라 승려 법안이 신라에서 신나침반(新羅針盤) 얻어간 사실이 있고
            669년 5월에는 신라(新羅)에서 중국으로 신나침반(新羅針盤) 두 상자를 당에 보냈다는 기록이 있다.
            또 672년 9월에 신나침반(新羅針盤) 1,500 개를 중국의 당(唐)나라 에 보냈다는 기록이 있다.

            신라(新羅)시대 장보고(張保皐 : 출생년도 미상 ~ 841년 사망 ) 가 청해진(완도)를 중심으로
            당나라, 일본, 동남아시아, 서역(아랍)의 여러나라들과 해상 교역을 했는데
            이때 원양항해를 하였던 신라의 선박들은 나침반을 장치하고 항해를 하였다고 봐야 한다.

            이것은 중국이 나침반을 만들기 훨씬전에 한국에서는 나침반을 만들었다는 증거이고
            또 나침반의 어원이 신나침반(新羅針盤)에서 신(新)자를 빼버리고 나침반(羅針盤)이 되어 버렸다.


          인쇄술

            중국에서는 다음과 같은 2가지 사실을 들어 자신들이 활자를 세계 최초로 만들었다고 주장한다.

            중국 최초의 활자는 송(宋)나라 ( 北宋 : 960 년 ∼ 1127 년 ) 시대의 1041년 ~ 1048년경에
            필승(畢昇 : 990년 ~ 1051년 )이라는 사람이 점토에 아교를 섞어 만든 찰흙 활자를 말한다.
            그러나 이때 만들어 사용했다는 찰흙 활자나 인쇄본 의 실물들은 하나도 전해지는 것이 없고,
            다만 문헌에서 그렇게 활자를 만들고 인쇄를 했다는 기록만 있는 것이다.

            몽고군이 중국을 지배하였던 원(元) 나라 (1271 년 ~ 1368년 )시대때인
            1313년 중국의 왕정(王禎)이라는 사람이 목활자 6만 자를 새겨 농사 기술에 관한 책을 출판했다.

            일본의 백만탑다라니경(百萬塔陀羅尼經)은 서기 770년에 간행된 것이다.

            중국의 (금강반야바라밀경)은 당(唐)나라 ( 618 년 ~ 907 년 ) 시대 때인
            서기 868년 목판을 만들어 인쇄한 것이다.

            한국에서는 경주에 있는 석가탑을 해체 복원하는 공사를 하다가 탑속에서
            무구정광대다라니경 (無垢淨光大陀羅尼經)이 발견되었는데
            목판으로 인쇄되어 있는 인쇄본의 제작 년대를 706년 ~ 751년 사이라고 한다.
            그러니 세계 최초의 목판 인쇄본은 <무구정광대다라니경 : 無垢淨光大陀羅尼經> 인 것이다.

            금속활자의 경우에는
            고려 ( 高麗 : 918 년 ~ 1392 년 ) 시대 때인 1377년 (우왕 3 년 )
            충청도 청주(淸州) 에 있는 흥덕사(興德寺)에서 주자(鑄字)한 금속활자로 찍은 직지(直指)라는 책이
            세계 최초로 금속활자로 만든 인쇄물인 것으로 유네스코에서 공인되어 밝혀졌다.
            이 책은 현재 프랑스 파리의 국립박물관에 소장 되어 있다.

            인구가 많아서 인쇄를 하여 책을 만들어 내어야 하는 중국에서
            목판이든,,, 찰흙판이든,,,, 금속활자든,,,, 중국에서 인쇄술이 발전된 것이 사실이지만
            그런 것을 최초로 만든 민족은 중국 민족이 아니라 우리나라 민족이었던 것이다.


        고구려의 피라미드

          고구려의 수도이었던 중국 길림성 연변 집안 (中國 吉林省 集安)에는
          고구려(高句麗)의 광개토대왕의 무덤 (廣開土王陵)인지 장수왕(長壽王)의 무덤인지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은
          피라미드형식의 거대한 무덤 ( 장군총이라고 부름 ) 이 있다.
          이 장군총과 가까운 거리에 광개토대왕의 비석이 있고 또 장군총보다 4배나 큰 적석총이 있는데
          이 적석총이 광개토대왕의 무덤이라고 추정하기도 한다.

          광개토대왕(廣開土大王)은 AD 413 에 돌아가셨고
          장수왕(長壽王)은 AD 491년에 돌아가셨다.


<< 장군총의 모습 >>

          고구려(高句麗)는
          BC 37년에 졸본(환인 )의 오녀산성에서 나라를 세웠으며,
          AD 2년 즉 유리왕 22년에 집안 (국내성)으로 천도하였으며,
          AD 427년까지 장수왕 15년 까지 이 집안(集安)을 400 년 넘게 고구려의 수도로 삼았다.

          고구려의 수도였던 만주 집안(集安) 지역에는 무려 1만 기 이상의 고구려 고분이 있다.
          돌무지 무덤에 3단, 5단, 7단식으로 층 수가 증가하면서 마치 계단식 피라밋 형식으로 돌무덤을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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