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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군(檀君)의 자손 --- 고조선 시대

      고조선(단군조선)의 건국

        일제 시대의 역사 학자들이 단군(檀君)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았고 신화일뿐이라고 주장하여,
        그의 실제적인 인물로 인정하지 않았던 적도 있었지만,
        한국의 역사책인 << 삼국유사 >> << 조선왕조실록>><<환단고기>><< 단기고사>><< 규원사화>>등의 책에서
        단군(檀君)이 고조선을 건국하고 백성들을 다스린 기록들이 있고,,,,
        중국의 역사책인 << 위서(魏書) >> << 고기(古記) >> 등에서도 고조선을 건국한 단군(檀君)의 기록이 있으므로,
        지금은 학계에서도 단군(檀君)을 신화인물이 아닌 실제로 고조선을 세운 왕이라고 정식으로 인정하고 있다.

        단기고사(檀奇古史)는
        발해를 건국한 대조영의 아우 반안군왕(般安郡王) 대야발(大野勃)이 8세기경에 편찬했다는 역사서이다.
        환단고기(桓檀古記) 는
        지금까지 전해 내려오던 역사책 5권을 묶어서 계연수(桂延壽) 라는 사람이 만들었다
        규원사화(揆園史話)는
        조선시대인 1675년에 북애자 라는 학자가 저술한 역사책이다.
        삼국유사(三國遺事)는
        고려시대인 1281년에 중이었던 일연이라는 스님이 쓴 역사책이다.

        그러면 단군(檀君)이 세운 고조선(古朝鮮)에 대해서 알아보자.
        우리가 보통 고조선(古朝鮮)이라고 하는데, 원래 고조선(古朝鮮)이라는 나라는 없었다.
        단군이 세운 나라는 조선(朝鮮) 이었다
        그리고 한참 뒤에 태조 이승계가 또 조선(朝鮮)이라는 나라를 세우면서
        단군이 세운 조선(朝鮮)을 고조선(古朝鮮)이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에서는 <환인>의 아들인 <환웅>이 무리 3,000 명을 이끌고
        태백산 꼭대기에 있는 신단수에 내려와 신시(神市)를 열었다고 하며,
        BC 2333년 단군이 도읍지를 평양으로 옮겼다고 기록하고 있다.

        평양은 만주 땅 여러 곳에 그 지명이 남아 있다.
        만주 땅(요동지역)의 넓은 평야지대에는 평양이라는 지명이 여러군데 있다.
        그래서 평양은 넓은 땅을 가리키는 보통명사일 수도 있다고 보고,
        이북의 대동강가에 있는 평양도 마찬가지의 논리로
        만주 땅(요동지역)에 거주하던 사람들이 이주하여 만든 도시일 가능성이 많은 것이다.

        고조선의 도읍지였던 평양이 어디인지는 정확하게 밝혀진 것은 없지만,
        요하(遼河:랴오허강)지역의 홍산(紅山 : BC 3500 년경의 신석기 유물출토 )지역과
        하가점(夏家店 : BC 2400 년경의 청동기 유물 출토)지역이 고조선의 도읍지였을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한국의 역사책인 << 삼국유사 >> <<환단고기>><< 규원사화>>등의 책에서
        고조선의 47대 임금의 이름과 치세내용이 나오는데 임금의 이름은 같지만, 연대는 책마다 조금씩 다르다.

        임금의 이름은 다음과 같다.

          1. 단군(檀君)
          2. 부루(夫婁)
          3. 가륵(嘉勒)
          4. 오사(烏斯) 또는 오사구(烏斯丘)
          5. 구을(丘乙)
          6. 달문(達文)
          7. 한율(翰栗)
          8. 우서한(于西翰) 또는 오사함(烏舍咸)
          9. 아술(阿述)
          10. 노을(魯乙)
          11. 도해(道奚)
          12. 아한(阿漢)
          13. 흘달(屹達)
          14. 고불(古弗)
          15. 벌음(伐音) 또는 후흘달(後屹達)
          16. 위나(尉那)
          17. 여을(余乙)
          18. 동엄(冬奄)
          19. 구모소(구牟蘇) 또는 종년(縱年)
          20. 고홀(固忽)
          21. 소태(蘇台)
          22. 색불루(索弗婁)
          23. 아물(阿勿)
          24. 연나(延那)
          25. 솔나(率那)
          26. 추로(鄒盧)
          27. 두밀(豆密)
          28. 해모(奚牟)
          29. 마휴(摩休)
          30. 나휴(奈休)
          31. 등올(登兀)
          32. 추밀(鄒密)
          33. 감물(甘勿)
          34. 오루문(奧婁門)
          35. 사벌(沙伐)
          36. 매륵(買勒)
          37. 마물(麻勿)
          38. 다물(多勿)
          39. 두홀(豆忽)
          40. 달음(達音)
          41. 음차(音次)
          42. 을우지(乙于支)
          43. 물리(勿理)
          44. 구홀(丘忽) 또는 구물(丘勿)
          45. 여루(余婁)
          46. 보을(普乙)
          47. 고열가(古列加)


        단군(檀君)이 고조선을 건국한 시기와 멸망시기를 보면
        << 규원사화>> 에서는 기원전 2333년에 건국하여 기원전 1128년에 멸망했다고 하며,
        << 환단고기>> 에서는 기원전 2333년에 건국하여 기원전 238년에 멸망했다고 하며
        << 단기고사>> 에서는 기원전 2512년에 건국하여 기원전 416년에 멸망했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 공식적으로 사용하는 연대는 기원전 2333년에 건국한 연대를 사용하고 있으며
        서기 2007년은 단기로는 (2007 + 2333) = 4340 년이다.
        개천절 행사에서 사용하는 연대도 이것을 사용한다.

        기원전 1291년에 고조선의 25대 왕인 솔나(率那)단군이 영고탑으로 도읍을 옮기게 되는데,
        이때 서여가 기자조선을 건국한다 (B.C.1291)
        이 시기를 기점으로 앞에 있는 것을 전기 고조선 ( 또는 단군조선 ) 이라고 하고,,,
        뒤에 있는 것을 후기 고조선 ( 또는 기자 조선) 이라고 부른다.
        기자조선은 기원전 1291년에 건국하여 기원전 194년에 멸망하는데,
        모두 42대에 걸쳐서 1097년간 지속되었다.

        단군왕검(檀君王儉)이 세운 조선(朝鮮) 이라는 나라가
        기원전 1291년경에 중국 은나라에서 기자(箕子)라는 사람이 와서 임금이 되면서 기자조선 (箕子朝鮮) 이 되었고,
        또 기원전 194년에는 중국의 연(燕)나라 사람인 위만(衛滿) 이라는 사람이 기자조선을 멸망시키고
        위만 조선 ( 衛滿朝鮮 )을 건국했다고 하지만, 위만(衛滿) 이라는 사람도 한국 민족이었다.


      단군 조선 (檀君 朝鮮) 과 기자 조선 (箕子 朝鮮) 그리고 위만 조선 ( 衛滿朝鮮 )

        단군 조선 (檀君 朝鮮)

          BC 2333 년 단군(檀君) 임금님께서 백악산의 아사달에서 조선(朝鮮)을 건국하였다.

          최초의 수도는 아사달(阿斯達)이라고 하는데 정확한 위치는 아직도 모른다.
          어떤 학자는 중국의 요령성 부근이라고 하고,,,,,,,
          또 어떤 학자는 북한의 평양 부근이라고도하고,,,,
          규원사화라는 책에서는 발해의 중경지역으로 지금의 길림시 지역이라고 말하고,,,
          또 어떤 학자는 중국의 북경 근처인 낙양으로도 추측한다.

          단군 조선이 BC 2333년에 건국되었다는 사실은 여러 역사서에서
          중국의 당요(唐堯)임금 즉위후 25년 뒤에 고조선이 건국되었다고 적고 있기 때문이다.
          중국의 역사서인 사기(史記)에 따르면
          삼황오제중에서 오제의 4번째 임금인 당요(唐堯)임금은 BC 2357년에 즉위하였다고 적고 있다.

          북한에서는 평양근처에 단군릉이 있다고 주장하는데, 실제로 단군릉인지 아닌지 알수가 없는 상태이다.
          내 개인적인 생각인데,,,,,,
          단군왕릉은 중국 만리장성 동쪽,,, 요하(遼河)강 사이에 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즉 고조선(古朝鮮)은 한반도에 있었던 나라가 아니고,
          중국의 만리장성 바로 앞에 있었던 나라였던 것이었다.

          청나라의 학자였던 호위(胡渭)라는 사람이 우공추지(禹貢錐指)라는 책을 저술하였다.
          책의 내용 중에는 << 산동반도는 요(堯) 임금 때부터 조선의 땅 >> 이라고 적혀있다.
          또 << 동이 9족은 우이이고, 우이는 조선이다 >> 라고 했다.
          즉 요(堯) 임금 시대때가 BC 2200 년 경이라고 추증하면
          그 당시 고조선(古朝鮮)은 중국의 산동반도쪽에 있었다는 말이다.


        기자 조선 (箕子 朝鮮)

          BC 1766 년부터 중국에서는 은(殷) 나라( BC 1766 년 ~ BC 1027 년 )가 있었다.
          은(殷) 나라의 지배층은 동이(東夷)라고 중국에서 가장 유명한 역사서인 사기(史記)에 적혀있다.

          BC 1122 년 주역(周易)의 괘사(卦辭)를 지었다는 주(周) 문왕(文王)이
          은(殷) 나라의 지배를 벗어나서 주(周) 나라를 건국하였다.
          주(周) 문왕(文王)이 죽고 둘째 아들이 왕위를 계승하였는데, 바로 주(周) 무왕(武王)이었다.

          BC 1046 년 주(周) 무왕(武王)은 은(殷) 나라를 공격하여 주왕(紂王)을 죽임으로 은(殷) 나라는 멸망하였다.
          주(周) 무왕(武王)은 낙읍 ( 지금의 시안(西安) 부근 )을 도읍으로 정하고
          통일된 중국 각지에 친척과 장군들을 보내어 제후로 봉했으며, 중앙집권적인 고대국가를 만들었다.

          한(漢)나라 초기에 저술된 상서대전(尙書大傳)의 기록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은(殷) 나라의 지배층이었던 기자(箕子)는
          은(殷) 나라가 멸망하자, 주(周) 왕조에 반발하여, 일족들을 이끌고 고죽국(孤竹國)으로 갔다.
          주(周) 무왕(武王)은 이 소식을 듣고 기자(箕子)를 조선후(朝鮮侯)에 봉하였다.

          여기서 말하는 고죽국(孤竹國)은 은(殷) 나라시대때 은(殷) 나라의 제후국이었는데
          그 위치가 한반도가 아니라
          현재의 중국의 산동반도에서 조양(朝陽 : 차오양) 그리고 요동반도까지의 지역에 걸쳐있었던 곳이었다.
          이때부터 이곳을 기자(箕子)가 다스렸다고 해서 기국(箕國)이라고 하였으며,
          이곳에 살았던 주민들을 기족(箕族)이라고 불렀고,
          성씨 중에서도 기씨(箕氏)의 조상들이 이때부터 생겨났다.
          이 지역에는 기현(箕縣), 기옥산(箕屋山), 기산(淇山), 기령(箕嶺) 등의 지명이 아직도 남아 있다.

          기자(箕子)가 고조선(古朝鮮)지역을 다스리는 임금이 되어서
          이때부터 고조선(古朝鮮)을 기자조선 (箕子朝鮮) 이라고 부른다.

          기자(箕子)가 한반도까지 가서 고조선(古朝鮮)지역을 다스리는 임금이 되었다는 학설도 있는데
          이 학설은 신뢰성이 없는 학설로 학계에서 인정하는 학자들이 별로 없는 상태이다.

          기자(箕子)의 무덤

            당(唐 : 618 년 ~ 907 년)나라 시대, 당(唐) 현종(玄宗 -- 712 년 ~ 756 년) 때 유명한 역사학자였던
            사마정(司馬貞)이 사기색은(史記索隱)이라는 역사책을 저술했는데 여기에서 다음과 같이 적혀있다.
            << 기자(箕子)의 묘가 하남성(河南省), 몽현[蒙縣 --- 현재의 상구현(商邱縣)]에 있다 >>

            하남성(河南省)은 황하(黃河)강의 남쪽에 위치하여 그 이름이 지어졌으며,
            중국 발음으로는 <허난> 이라고 부른다.
            중국 지도를 보면 하남성(河南省)은 중국의 한복판에 위치하고 있으며,
            무협지에 많이 등장하는 소림사(少林寺)도 이곳에 있고
            또 무협소설에서 중원(中原 )이라는 지명도 바로 이곳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기자(箕子)가 주(周) 무왕(武王)에게 쫒겨서 중국 본토의 동쪽으로 갔다는데
            기자(箕子)의 무덤은 중국 한복판에 있다 ????


          공자(孔子) 이야기

            중국 춘추전국시대 중국의 산동성(山東省) 곡부 (曲阜), 당시에는 노(魯)나라에서 태어난
            공자 (孔子 ; BC 552년 ~ BC 479 년 )는 36세 때 노(魯)나라에 난이 일어나 제(劑)나라로 갔다.
            공자(孔子)는 제(劑)나라의 왕과 신하들에게도 여러 가지로 진리를 가르쳤다가
            2년후에는 다시 고향인 노(魯)나라로 되돌아 왔다.

            그리고 노(魯)나라에서 벼슬을 하였는데 52세때에는 대사구라는 높은 직책까지 올라갔었다.
            54세 때인 BC 496 년 노(魯)나라에서 큰 뜻을 이루지 못할 것으로 판단하여 벼슬직을 사직한 후,
            대여섯 명의 제자와 함께 자기를 등용해 줄 왕을 찾아 여행을 떠났다
            제자들과 온갖 고초를 무릅쓰고 위(魏), 송(宋), 조(趙), 정(鄭), 진(陳), 채(蔡) 등
            여러 나라를 14년 동안 여행하였지만, 어느 나라에서도 공자(孔子)를 오래 등용하지 않았다.

            68세 다시 고향인 산동성(山東省) 곡부 (曲阜)로 돌아와서 제자들을 가르치다가
            72세가 된 해인 BC 479년에 숨을 거두었다.

            중국의 역사책인 사기(史記)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 공자 (孔子 ; BC 552년 ~ BC 479 년 )가 진(陳)나라(현재의 허난성(河南省) 카이펑(開封) 부근)에 머물 때
            싸리나무 화살에 맞은 매 한마리가 떨어져 죽자
            공자(孔子)가 < 이 화살은 숙신(肅愼)의 것 >이라고 했다 >>

            당시 공자(孔子)는 숙신(肅愼)의 화살을 정확히 알고 있었음을 보여 준다.
            그리고 여기서 말하는 숙신(肅愼)은 고조선(古朝鮮)을 의미 함으로,
            당시에도 고조선(古朝鮮 = 기자조선 (箕子朝鮮))의 세력이 그곳까지 뻗쳐 있었음을 알수 있는 것이다.


          기자조선 (箕子朝鮮)의 멸망

            기자(箕子)가 세운 기자조선 (箕子朝鮮)의 마지막 왕은 준왕(準王)이다.

            주(周) 나라가 힘이 약해지면서
            중국은 500년간 춘추전국시대 ( BC 770 년 ~ BC 221 년 )의 전란 속에서 지내게 된다.
            BC 221 년 진시황(秦始皇)이 중국을 통일하였다.

            중국의 남부지역에서 진시황(秦始皇)이 중국을 통일하고 난 후
            중국의 북부지역에서는 기자(箕子)가 세운 기자조선 (箕子朝鮮)에서는 마지막 왕인 준왕(準王)이 즉위하였다.

            BC 210 년 진시황이 죽고,
            BC 206 년 진시황의 아들이 다스리던 진(秦) 나라는 유방(劉邦)에게 항복하고 멸망하였다.

            중국은 다시 전국 칠웅(戰國七雄)의 나라들이 다시 일어나게 되는데
            대표적인 나라가 유방(劉邦)의 한(漢)나라와 항우(項羽)의 초(楚)나라이었다

            이 전란의 기간에 전쟁을 피하기 위해서
            연(燕), 제(齊), 조(趙)나라 등의 백성들이 기자조선 (箕子朝鮮)으로 도망하여 왔다.
            기자조선 (箕子朝鮮)의 준왕(準王)은 이들을 서쪽지방에 살게 하였다.

            BC 195 년 연(燕)나라에서 망명해 온 위만(衛滿)을 박사(博士)로 삼고 서쪽 변방을 지키게 하였다.
            BC 194 년 위만(衛滿)이 모반을 일으키자 준왕(準王)은 측근만 데리고 남쪽으로 달아났다.
            준왕(準王)은 뱃길로 남하하여 전북 익산(益山)에 정착하여 목지국(目支國), 마한(馬韓)의 왕이 되었다.

            준왕(準王)의 후손들은 성(性)을 한씨(韓氏)라고 사용하였다.


        위만 조선 ( 衛滿朝鮮 )

          오래전인 BC 1100 년 부터 BC 221 년 까지 중국의 북쪽지역에 연(燕)나라 라는 나라가 있었는데,
          BC 221 년 연(燕)나라는 진(秦)나라의 진시황 (秦始皇)에게 멸망하였다.
          BC 202년에 건설된 한(漢)나라가 다시 중국 전체를 통일하여 통치하게 되었다.

          이 당시 멸망한 연(燕)나라 출신인 위만(衛滿) 이라는 사람이 고조선(古朝鮮)으로 투항하여 왔다.
          BC 194년에 위만(衛滿)은
          고조선(古朝鮮) 41대 왕인 준왕의 왕위를 찬탈하고 자신이 왕(王)이 되었는데,
          이때부터를 위만 조선 ( 衛滿朝鮮 )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국호도 조선(朝鮮)을 그대로 사용하여 위만 조선 ( 衛滿朝鮮 )이라하였고
          또 위만(衛滿) 이라는 사람도 한국 민족이었던 점을 봐서 같은 나라에서 임금만 바뀐정도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위만 조선 ( 衛滿朝鮮 )은 BC 108년 중국 한(漢)나라의 침입으로 멸망하게 되었다.
          그후 한(漢)나라는 고조선의 옛 땅에 자신들의 행정구역인 한사군을  설치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그 위치와 실효성에 대해서는 의문점이 많은 상태이다.


        참고 사항

          기자조선 (箕子朝鮮)이 있어든,,,,위만조선 ( 衛滿朝鮮 )이 있었든,,,
          그것은  고조선(古朝鮮)이 그대로 유지되면서,
          고조선의 한 쪽 변방 즉 중국과 아주 가까운 쪽에
          기자조선 (箕子朝鮮)이든,,,위만조선 ( 衛滿朝鮮 )이든,,, 있었을 것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들이 많다.


      고조선(古朝鮮)시대의 주변 상황

        중국의 역사서에 나오는 고조선(古朝鮮)

          중국의 역사서인 사기(史記)

            조선(朝鮮 = 고조선)에 대한 내용이 무려 15 회 나온다. ( BC 1120년 / BC 600 년 /  BC 338년 / BC 120년 )


          중국의 역사인 <삼국지 집해권30 위서38> 의 내용

            丁謙曰朝鮮史相傳其國肇自檀君傳一千四十八年至周初

            해석 :
            정겸(丁謙)이라는 중국의 역사학자가 말하기를
            조선사(朝鮮史 = 고조선의 역사)는 단군(檀君)으로부터 시작했는데,
            중국의 주( 周 : BC 1122년에 건국 )나라 초기에 벌써 1048년을 이어져 내려오고 있었다.


          대나무의 죽간에 기록 되어 있었던 죽서기년(竹書紀年)

            황제(黃帝)의 시대로부터 위(魏)나라 양왕(襄王)에 이르기까지의 일이 저술되어 있는 역사책인데
            여기에 이런 내용이 있다.

            << 주(周)나라 무왕이 은(殷)나라를 멸망 시킨 후인,
            BC 1120년(주(周)나라 무왕(武王) 15년)과 BC 1107년(주(周)나라 성왕(成王) 9년)에
            숙신(肅愼)에서 사신을 주(周)나라에 보내었다 >>

            여기서 말하는 숙신(肅愼)은 고조선(古朝鮮)을 말한다.


        고조선(古朝鮮 : BC 2333 년 ~ BC 238 년 )시대의 중국의 상황

          고조선의 통치기간인 2,000년 정도인데
          한국은 2,000년동안 고조선 1개의 국가였지만, 중국은 여러개의 왕조가 나타난다.

          고조선(古朝鮮)이 건국한 BC 2333 년은 중국의 삼황오제중에서 요(堯)임금이 다스리던 시대이었고,
          삼황 오제의 마지막 시대인 요(堯), 순(舜), 우(禹) 임금 시절을 거치고,,,,
          우(禹) 임금부터 시작된 세습왕조를 하(夏) 나라라고 하는데 BC 2070 년부터 하(夏)나라가 시작되었다.
          BC 1766년에는 하(夏)나라가 망하고 은(殷)나라가 건설되었으며,
          BC 1122년에는 은(殷)나라가 망하고, 주(周)나라가 건설되었으며,
          BC 770 년 ~ BC 221년 까지 약 500년간 중국은 무질서한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를 거치고
          BC 221 년 진시황 (秦始皇)이 중국을 통일하고 진(秦)나라를 건설하고,,
          BC 202 년에는 유방이 한(漢)나라를 건설하게 되고 한(漢)나라가 400년간 중국을 통치하게 된다.

          흉노의 중국 침략 ( BC 771 년 )

            중국의 북쪽 지방에서 유목생활을 하던 유목민족인 흉노(훈)족이
            BC 771년에 중국의 주(周)나라로 쳐들어와 주(周)나라 12대 왕인 유왕(幽王)을 살해했다.
            흉노족의 침략으로 주(周)나라는 동쪽으로 도망하여,
            낙읍(洛邑, 지금의 하남성 낙양)을 새로운 도읍지로 정하고 평왕(平王)을 새 왕에 앉혔다.

            참고 : 흉노족

            흉노족이 쳐들어 오기 전의 주(周)나라를 서주(西周 : BC 1122 년 ~ BC 771 년)라고 하고,
            낙읍으로 수도를 옮긴 이후의 주(周)나라를 동주(東周 : BC 771 년 ~ BC 256 년 )라고 하며,
            주(周)나라가 힘을 잃은 동주(東周)시대의 중국은
            약 500년간 전쟁을 치르는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를 맞이한다


          중국 피난민의 고조선(古朝鮮) 지역으로 유입 ( BC 722 년 ~ BC 221 년)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
            중국에서는 계속되는 전쟁으로 많은 피난민들이 북쪽의 고조선 쪽으로 이주를 하게 되었다.
            이때 고조선에서는 이들 피난민들을 지금의 요녕성(遼寧省) 금서시(錦西市)지역에서
            고조선의 주민들과 차별없이 함께 살수 있도록하였다.

            춘추 전국 시대 (春秋 戰國 時代 : BC 722 년 ~ BC 221 년) 지금의 산동반도 부근에 있었던
            노(魯)나라에서 태어난 공자 (孔子 ; BC 552년 ~ BC 479 년 ) 도
            당시에 어지러운 중국을 피해서 평화로운 고조선(구이)에서 살고 싶다고 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전쟁터인 중국을 피해서 평화로운 북쪽으로 고조선 영역으로 피난해 갔는데
            그들 피난민중에 연(燕)나라 출신인 위만(衛滿) 이라는 사람이
            BC 200년경에 고조선(古朝鮮)으로 투항하여 와서 살다가,
            BC 194년에 위만(衛滿)은 고조선(古朝鮮) 41대 왕인 준왕의 왕위를 찬탈하고 자신이 왕(王)이 되었는데,
            이때부터의 고조선을 위만조선 ( 衛滿朝鮮 )이라고 부른다.


          춘추 시대(春秋時代 : BC 722 ~ BC 481년) --- 춘추오패(春秋五覇)

            주(周) 나라 ( BC 1122 년 ~ BC 256년 )의 제후국이었던 제(濟), 진(晉), 초(楚), 오(吳), 월(越) 나라들이
            BC 722 년부터 주(周) 나라의 지배에서 벗어나서 독립하여 서로 싸우게 되는 시기이었다.


<< 춘추 시대 당시의 중국지도 >>

          전국 시대 (戰國時代 : BC 403년 ~ BC 221년)  --- 전국 칠웅(戰國 七雄)

            주(周) 나라의 지배에서 독립한 진(秦), 조(趙), 위(魏), 한(韓), 제(齊), 연(燕), 초(楚) 나라들이
            중국의 땅을 서로 차지 할려고 싸웠던 시기

            진(秦)나라 ( BC 771 년 ~ BC 221 년 ~ BC 206 년 )

              BC 771년에 주(周)나라가 흉노의 침략으로 동쪽으로 서울을 옮길때
              주(周)나라의 왕을 호위하였던 양공(襄公)이라는 사람이 주(周)나라의 제후로 발탁되어
              <진읍>을 중심으로 주(周) 나라의 제후국으로 시작하였다.

              BC 221 년 주변의 모든 나라를 정복한 진시황 (秦始皇)이 중국을 통일하였다.


            연(燕)나라 ( BC 1100 년 ~ BC 221 년 )

              주(周) 나라의 건국 공신이었던 소공(召公) 이
              지금의 북경을 중심으로 주(周) 나라의 제후국으로 시작하였다.

              연(燕)나라의 지배 계층 뿐아니라 대부분의 주민들도 선비족(鮮卑族)이었다고 생각되어진다.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청동기 문화가 발달되었던 북쪽의 선비족에 의해 초기 철기문화가 발달하였다.
                발달된 청동기 제조 기술이 없이는 철의 제조 기술을 하루 아침에 가질수 없다.

                BC 400 년 전후에 연(燕)나라에서 가장 발달된 철기 제품을 만들었다.

                (2) 위(魏), 촉(蜀), 오(吳)나라가 전쟁을 한 삼국시대 (三國時代 : 220 년 ~ 280 년 )에
                나오는 유명한 장수들은 자신은 연(燕)나라 출신의 선비족(鮮卑族)의 후예라고 말한다.

                (3) 이후로 중국 역사상 중국의 한족(漢族)에 반기를 든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은 연(燕)나라 출신의 선비족(鮮卑族)의 후예라고 자랑스럽게 이야기 한다.

                삼국시대 (三國時代 : 220 년 ~ 280 년 ) --- 위(魏)나라의 공손연(公孫淵)

                  228년 요동 지방의 군주로 군림했다.
                  237년 연왕(燕王)을 자칭하여 위(魏)에 반기를 들었다.
                  238년 사마의(司馬懿)의 군대에 패퇴하여 도주하던 중 생포되어 참수되었다.


                당(唐)나라 ( 618년 ~ 907년 ) 시대 --- 안록산 (安祿山 : 703년 ~ 757 년)

                  당(唐)나라의 무장으로 당(唐)에 반기를 들고
                  755년 화북 지역을 점령하여 안록산의 난을 일으켰다.
                  757년 취침중 암살 당했다.


              연(燕)나라의 북쪽에는 고조선(古朝鮮)이 있었는데,
              BC 400 년경에 연(燕)나라는 약해진 고조선(古朝鮮) 지역을 침략해 들어 가기 시작하는데,
              이 과정에서 중국의 발전된 철기 문화가 고조선을 거쳐 한반도로 전파되었다.

              연(燕)나라의 소왕(昭王: BC 311 년 ~ BC 279 년 ) 시절인
              BC 300년경 연(燕)나라는 진개(秦開)를 앞세워 고조선(古朝鮮)을 침략해 왔다.

              500년간을 춘추 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를 보내면서 전쟁을 하는 기술을 익힌 중국은
              말과 마차를 연결한 전차(戰車)를 이용하고,,, 말을 타는 기마술(騎馬術)을 익혀서,,
              고조선의 중심부인 요하(遼河)강 지역까지 침략해 들어 갔었다.
              큰 타격을 입은 고조선(古朝鮮)은 동쪽으로 근거지를 옮겨 한반도 북부지역으로 이동하였다.


            조(趙)나라 ( BC 403 년 ~ BC 228 년 )

              춘추시대 진(晉)나라에는 위(魏)씨, 조(趙)씨, 한(韓)씨 3명의 귀족이 있었는데,
              이들 3 사람이 진(晉)나라를 3분하여 각각 위(魏)나라, 조(趙)나라, 한(韓)나라를 세웠다.
              그래서 이들 3개의 나라들을 삼진(三晉)이라고 부른다.

              BC 307년 무령왕(武靈王) 시절
              장성을 쌓아, 대(代)로부터 시작하여 음산(陰山)을거쳐 고궐(高闕)에 이르기까지 요새를 건설하였다.


            제(濟) 나라 ( BC 1046 년 ~ BC 386 년 )

              주(周) 나라의 건국 공신이었던 태공망(太公望 : 성(性)은 강(姜)씨 ) 이
              지금의 산동 반도를 중심으로 주(周) 나라의 제후국으로 시작하였다.


            위(魏) 나라 ( BC 453 년 ~ BC 225 년 )

              BC 453 년 주(周)나라 왕족의 후손이었던 위구(魏駒)라는 사람이
              진(晉)나라에서 독립하여 위(魏)나라를 세웠다.


<< 전국 시대 당시의 중국 지도 >>

          연(燕)나라의 고조선(古朝鮮) 침략 ( BC 400 년 ~  BC 300 년 )

            연(燕)나라와 고조선(古朝鮮)은 국경을 접하고 있었는데,
            중국의 사람들이 자꾸 북쪽의 고조선 지역으로 이주해가는 것을 못마땅해 하던 연(燕)나라에서
            BC 400 년경에 고조선(古朝鮮) 지역에서 살고 있는 중국인들의 거주지를 침략해 들어 갔다.

            이때 고조선(古朝鮮) 지역에서 살고 있는 중국인들은
            지금의 요녕성(遼寧省) 금서시(錦西市)지역에서 집단을 이루고 살고 있었는데
            당시에 연(燕)나라의 침략에 대비하여 성(城)을 쌓았다.

            또 BC 281년경 연(燕)나라는 진개(秦開)를 앞세워
            고조선(古朝鮮)의 중심부인 요하(遼河)강 지역까지 침략해 들어 갔었다.
            큰 타격을 입은 고조선은 동쪽으로 근거지를 옮겨 한반도 북부지역으로 이동하였다.


          연(燕)나라의 멸망 ( BC 222 년 )과 진(秦)나라의 중국 통일 ( BC 221 년 )

            중국에서는 BC 222년 진(秦)나라가 연(燕)나라를 멸망시키고 BC 221 년 중국을 통일했다.
            500년간의 전쟁을 끝낸 진시황은 강력한 통일 정책을 펼쳤다.


          진(秦)나라의 멸망 ( BC 207 년 )과 한(漢)나라의 중국 통일 ( BC 202 년 )

            중국은 다시 항우가 이끄는 초(楚)나라와 유방이 세운 한(漢)나라가 전쟁을 하게 된다.
            이 전쟁은 BC 202년 유방이 승리함으로써 중국은 다시 한(漢)나라가 통일하게 되었다.


          기자조선(箕子朝鮮)의 멸망과 위만조선(衛滿朝鮮) 건국 ( BC 194 년 )

            연(燕)나라가 멸망한 후 연(燕)나라 출신의 위만(衛滿)이라는 사람이 자신의 종족을 이끌고
            BC 200 년경에 고조선 (古朝鮮 = 기자조선(箕子朝鮮)으로 투항하였다.
            기자조선은 위만(衛滿)에게 중국과 가장 가까운 서쪽 지역을 지키는 임무를 맡겼는데
            위만(衛滿)은 쿠데타를 일으켜 기자조선(箕子朝鮮)의 준왕(準王)을 축출하고 BC 194년에 왕위에 올랐다.


          고조선(古朝鮮) = 위만조선(衛滿朝鮮)의 멸망 ( BC 108 년 )

            BC 108년 막강한 세력으로 성장한 한(漢)나라의 침략으로
            고조선(古朝鮮) = 위만조선(衛滿朝鮮)은 멸망하였다.

            그뒤 한(漢)나라에서는 고조선(古朝鮮)의 지역에 한사군(漢四郡)을 설치하였다


        고조선(古朝鮮 : BC 2333 년 ~ BC 238 년)의 위성 국가였던 거수국(渠帥國)

          고조선은 만주 지역의 요하(遼河)강 유역과 한반도를 지배하고 있었는데,
          각 지역마다 여러 다른 민족들이 있었다.
          이들은 고조선의 통치를 받는 자치국 형태를 유지했는데 이런 나라들을 거수국(渠帥國)이라고 불렀다.

          고조선이 거느린 거수국을 보면 다음과 같다.

            고구려 (高句麗) -- 곰을 섬겼다.

              중국의 주(周)나라 주무왕 (周武王 ; BC 1169 ~ BC 1116 )이 은(殷)나라 멸망시키고,
              그리고 지금의 산시성(陝西省) 시안(西安) 부근-- 당시의 호경(鎬京) -- 에 도읍을 정하고,
              주변에 있는 종족들을 초청하여 잔치를 벌렸는데
              이때 고구려인인 고이(高夷)가 참석했다고 하는 기록이 남아 있다.

              이 중국 역사서를 믿는다면
              고구려는 BC 1100 년 이전에 이미 존재하였던 나라였다.

              중국 옛날 역사책에서는
              졸본 부여(卒本夫餘)와 졸본 고구려(卒本 高句麗)가 혼용되어 사용되고 있으며,
              부여(夫餘)와 고구려(高句麗)도 같은 나라 처럼 사용되고 있다.

              BC 238년에 해모수(解慕漱)가 건설한 부여국(夫餘國)을
              해모수계(解慕漱系) 고구려(高句麗)라고 하기도 한다.

              그런데 한국 역사책에서는
              BC 58년에 고주몽(高朱蒙)이 고구려(高句麗)를 건설했다고 적고 있다.

              이것도 기존에 있던 부여(夫餘)를 신진 세력집단인 해모수가 장악하면서 북부여(北夫餘)라고 했듯이,
              기존의 소규모 부족국가였던 고구려(高句麗)를
              고주몽(高朱蒙)이 장악하고 정상적인 국가의 틀을 만들었다고 볼수 있다.


            부여 (夫餘)  -- 사슴을 섬겼다. ( 사슴을 뜻하는 만주어는 <Puhu> 이었다 )

              부여(夫餘 : BC 238년 ~ AD 494년)는 지금의 쑹화강 유역을 중심으로
              중국의 만주 일대에서 고조선의 전통성을 이어 강성한 국가로 발전하였으나,
              남쪽에서 고구려(高句麗)가 건국되어 세력이 점차 강해지면서 서서히 고구려에 합병되어 갔다.

              중국의 역사책에서는
              중국의 진(秦)나라 ( BC 221 ~ BC 206 년 ) 시대때 진(秦)나라의 북쪽에 부여(夫餘)가 있었고,
              부여(夫餘)의 상인들이 중국의 진(秦)나라에 와서 장사를 했다고 적고 있고,
              부여국(夫餘國)은 원래 예(濊)족이 살던 땅으로
              남쪽은 고구려(高句麗), 동쪽은 읍루(獵婁), 서쪽은 선비(鮮卑), 북쪽으로는 약수(弱水)와
              접하고 있었다고 적고 있다.

              한국의 역사책인 <삼국유사>에 따르면
              BC 59년에 해모수가 북부여(北夫餘)를 건국했다고 하는데,
              이것은 원래부터 있던 부여(夫餘)를 신진집단인 해모수가 장악하면서
              그때부터 부여(夫餘)를 북부여(北夫餘)라고 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동부여(東夫餘)는 해모수가 아들인 해부루(解夫婁王)로 하여금
              동쪽지역인 가섭원(迦葉原 : 지금의 강원도 강릉 지방)에 세운 나라이다.
              해부루왕, 금와왕, 대소왕으로 왕위가 계승되어 오다가,
              AD 22년 고구려 3대 왕인 대무신왕(大武神王: 재위 AD 18 년 ~ AD 44 년) 의 공격으로
              대소왕(帶素王)은 죽고, 동부여(東夫餘)는 고구려에 항복하고 고구려에 귀속되었다.

              부여국(夫餘國)은
              494년 고구려의 전성기였던 21대 왕인 문자명왕(文咨明王 : 재위 492년~519년) 때에 
              부여국(夫餘國)의 왕(王)은 고구려에 항복하고 부여국(夫餘國)은 완전히 멸망하였다.


            기자조선 (箕子朝鮮 : BC 1291 년 ~ BC 194 년 )

              기자조선(箕子朝鮮)은
              은(殷) 나라 (BC 1766 년 ~ BC 1027 년 ) 왕족 출신의 기자(箕子)라는 사람이
              고조선(古朝鮮) 지역에 들어와서 세운 고조선(古朝鮮)의 제후국으로
              BC 1291년에 건국하여
              연(燕)나라 출신의 위만(衛滿)이라는 사람에게 BC 194년에 멸망하는데,
              모두 42대에 걸쳐서 1097년간 지속되었다.

              기자(箕子)는 중국 상(商)나라 마지막 왕인 걸왕의 작은 아버지이다.
              상(商)나라가 주(周)나라 무왕에 의해 망하게 되는데,
              이때 기자(箕子)는 자신은 상(商)나라 사람으로 주(周)나라의 녹을 먹을 수 없다며 조선 땅으로 망명했다. 이를 섭섭하게 여긴 주(周)나라 무왕이 기자(箕子)를 < 조선의 왕 >으로 봉했다는 것이
              중국측이 주장하는 기자조선(箕子朝鮮)의 근거이다.

              중국의 동북공정은
              기자(箕子)가 건설한 기자조선(箕子朝鮮)은 주(周)나라가 임명한 제후국이고,
              기자(箕子)도 중국인이니 <고조선은 중국의 일부이다> 라는 억지 주장을 펴고 있다.

              중국의 억지 (1) -- 중국의 역사서에 나오는 기자조선(箕子朝鮮)의 위치가 지금의 북경근처이다.

              중국의 억지 (2) -- 주(周)나라를 피해 조선 땅으로 망명한 기자(箕子)가 만리장성 안에 있었다.

              중국의 억지 (3) -- 당시 그곳의 지명이 <조선현>이었다.

              중국의 억지 (4) -- 나라 이름을 왜 조선(朝鮮)이라고 사용했나

              중국의 억지 (5) -- 중국 역사서에 은(殷)나라 왕족은 동이족(東夷族)이라고 적혀있다.

              최근에 밝혀진 한사군(漢四郡 : 낙랑, 임둔, 진번, 현도)의 위치와 기자조선 (箕子朝鮮) 의 위치가
              중국의 만리장성 안쪽인 것이 밝혀지면서,
              그곳까지 고조선(古朝鮮)의 영토였음이 증명되고 있다.

              BC 1291년경에는
              북쪽의 고조선(古朝鮮)은 강성한 국가였고 남쪽의 중국은 상(商)나라가 멸망하기 직전의 상태였다.
              이때 중국을 탈출하여 고조선(古朝鮮)으로 망명해온 기자(箕子)에게
              고조선(古朝鮮)의 왕은 변방 지역의 통치를 맡기고,
              그가 이끄는 나라를 기자조선(箕子朝鮮)이라는 거수국(渠帥國)으로 거느렸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위만조선 (衛滿朝鮮 : BC 194 년 ~ BC 108 년 )

              연(燕)나라가 멸망한 후 연(燕)나라 출신의 위만(衛滿)이라는 사람이 자신의 종족을 이끌고
              기자조선(箕子朝鮮)으로 투항한후 쿠데타를 일으켜 기자조선(箕子朝鮮)을 멸망시키고,
              BC 194년 자신이 스스로 왕위에 올랐다.

              위만(衛滿)이 다스린 위만조선(衛滿朝鮮)은 100년도 못견디고,
              막강한 세력으로 성장한 한(漢)나라의 침략으로 BC 108년 멸망하게 된다.


            고죽((孤竹)

            예(濊) -- 호랑이를 섬겼다.

              중국의 주(周)나라 주무왕 (周武王 ; BC 1169 ~ BC 1116 )이 은(殷)나라 멸망시키고,
              그리고 지금의 산시성(陝西省) 시안(西安) 부근-- 당시의 호경(鎬京) -- 에 도읍을 정하고,
              주변에 있는 종족들을 초청하여 잔치를 벌렸는데
              이때 예(濊)족과 맥(貊)족이 참석했다고 하는 기록이 남아 있다.

              곰족인 고구려족에게 밀리고 또 부여족에게 밀려 동쪽으로 이동하여
              함경도 지역에서 옥저와 동예를 세웠으나 곧 고구려의 지배를 받다가 사라져버렸다. ‘


            맥(貊) -- 예(濊) 과 인접하여 살았다.

              예(濊)족과 맥(貊)족을 함께 불러 예맥(濊貊)족이라고도 하는데,
              고조선 시대에는 자신들의 힘을 가지고 있었으나,
              부여와 고구려의 세력에 밀리면서 나중에는 고구려의 지배를 받게되는 하층민으로 전락하였다.

              예맥(濊貊)족  ---> 조선족(朝鮮族) ---> 부여족 ---> 고구려족
              모두 같은 언어를 사용했었다.


            추(追)

            숙신(肅愼) --- 읍루(獵婁) --- 말갈(靺鞨) & 여진(女眞)

              고조선 연구에서 더 중요한 부분은 숙신(肅愼)이다.
              고조선 그 자체이거나 고조선의 가장 큰 뿌리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함경도 지역과 러시아의 사하린 지역에 거주하고 있었던 이들 민족은
              숙신(肅愼), 물길(勿吉), 말갈(靺鞨) 등으로 불리기도 하였다가,
              읍루(獵婁)로 불리기도 하였다가,,, 나중는 여진족(女眞族), 만주족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읍루(獵婁)는 부여(夫餘)의 동쪽끝에 해당하였는데,
              혹독하게 추운 날씨와 나무가 우거진 산림속의 산악지방에서 활을 잘 다루는 민족이었다.

              읍루(獵婁) 사람들은 부여(夫餘)에 예속되어 왔는데, 부여(夫餘)가 세금과 부역을 무겁게 물리자,
              220년 ~ 226년 사이에 반란을 일으켰다.
              부여(夫餘)는 읍루(獵婁)에 여러번 원정군을 파견했으나, 끝내 읍루(獵婁)굴복시키지 못했다.

              읍루(獵婁) 사람들이 사용한 언어는 부여(夫餘)와 고구려에서 사용하는 언어와는 달랐다.
              읍루(獵婁)는 다시 말갈(靺鞨)과 여진(女眞)으로 발전해 나간다.


            몽고(蒙古) 지역 --- 서요하(西遼河) 지역

              선비(鮮卑) :

              거란(契丹)

              몽고(蒙古)

              융노(匈奴)

              돌궐


            청구(靑丘)

            양이(良夷)

            양주(楊州)

            발(發)

            유(兪)

            옥저(沃沮)

            진(辰)

            비류(沸流)

            행인(荇人)

            낙랑

            임둔

            진번

            현도

            해두(海頭)

            개마(蓋馬)

            구다(句茶)

            조나(藻那)

            주나(朱那)

            한(韓, 삼한 - 마한, 진한, 변한)

              한반도 남쪽에 위치하였던 마한(馬韓), 진한(辰韓), 변한(卞韓)
              발굴되어지는 청동기 시대 유물을 생각하면 당시 이들 나라들은 상당히 발전된 나라였다.

              참고 : << 고인돌 >>


          고조선 (古朝鮮 : BC 2333 년 ~ BC 238 년)의 거수국(渠帥國) 중에서는
          중국의 한(漢)나라가 고조선(古朝鮮)지역을 공격하여 BC 108 년에 설치 했다는
          한사군(漢四郡 : 낙랑, 임둔, 진번, 현도) 의 지명과 함께 기자조선 (箕子朝鮮) 의 지명도 나온다.


        고조선(古朝鮮)시대의 한반도 상황

          마한 (馬韓)

            중국사람이 쓴 역사서인 삼국지 (위지동이전)에 따르면
            마한 (馬韓)에는 모두 54개 부족 국가가 있었는데
            각각의 부족에게는 족장이 있고
            큰 부족의 통솔자를 신지(臣智), 작은 부족의 통솔자를 읍차(邑借)라 하였다.

            54개 부족 국가중에서 강성한 부족 국가는 백제국(伯濟國)과 목지국(目支國)이었다고 한다.

            또 54개 부족 국가중에는 목지국(目支國) 이 있었는데,
            BC 194년경에 중국 북쪽지역의 연(燕)나라 사람인 위만(衛滿)이 기자조선 (箕子朝鮮)을 공격할때
            기자조선 (箕子朝鮮)의 41대 왕(王)인 준왕은 위만(衛滿)을 피하여 바닷길로 달아나,
            한반도의 남부 지역에서 목지국(또는 월지국)을 건설하였다고도 한다.
            즉 목지국(目支國)은 기자조선 (箕子朝鮮)의 멸망으로 생긴 국가임

            이 당시 마한(馬韓)에서는 큰 나라는 1만여 호, 작은 나라는 6천 ~ 7천 호였다고 한다.
            이 계산대로 한다면 당시 마한의 인구는 최소로 잡아도 100만명 ~ 200 만명 이었다.

            BC 18년경에 백제(百濟)의 온조왕(溫祚王)은 한강 하류의 하남위례성에 도읍을 정하고,
            마한(馬韓)의 여러 부족 국가들을 습격하여 백제(百濟)의 영토에 합병시켰다.
            AD 9년 백제(百濟)의 온조왕(溫祚王)의 공격으로 마한(馬韓)은 멸망하였다.

            그러나 마한(馬韓)과 백제(百濟)는 같이 공존하면서 지내다가,
            백제(百濟)의 근초고왕(近肖古王)  24년( AD 369 년 )에 전남지역의 마한(馬韓)이 완전히 멸망하였다.

            청주(淸州) 한(韓)씨의 족보를 보면,
            마한(馬韓)이 망했을 때 마한(馬韓)의 왕자가 백제(百濟)에 귀의 하지 않고 신라(新羅) 왕에게로 달아나
            청주(淸州) 한(韓)씨의 시조가 되었다는 구절이 나온다.


          진한 (辰韓)

            원래 만주 지역에 진(辰)이라는 나라가 있었다.
            이들이 남하하여 경상도 지역에 정착하면서 토착세력과 함께 여러 부족 국가를 만들었다.

            중국사람이 쓴 역사서인 삼국지 (위지동이전)에 따르면 진한 (辰韓)에는 모두 12개 부족 국가가 있었는데
            큰 나라는 5천 ~ 6천 가구,, 작은 나라는 6백 ~ 7백 가구라 하였다.

            이들 12개 나라중에서 사로국(斯盧國)이 주변을 합병하여 BC 57년에 건국하였으며
            정식으로 신라(新羅)로 나라 이름을 바꾼 것은 AD 504년 ( 지증왕 4년 ) 이었다.

            한국사람이 쓴 삼국사기에서도 이들 12개 나라 이외에 또 다른 10개정도의 나라가 있었는데
            이들 나라들은 모두 AD 100 년에서 AD 250 년 사이에 신라(新羅)에 합병되었다고 한다.

            진한(辰韓)의 마지막 왕이 < 태기왕 > 인데
            BC 40 년 박 혁거세 ( 朴 赫居世 )에게 서나벌군과 삼랑진( 경남 지역 ) 전투에서 처참하게 깨어지고,
            강원도 횡성군에 있는 태기산으로 숨어 들었으나 결국 신라군에 들켜 BC 37년에 죽었다.


          변한(弁韓)

            중국사람이 쓴 역사서인 삼국지 (위지동이전)에 따르면 변한(弁韓)에는 모두 12개 부족 국가가 있었는데
            이들 12개 나라중에서 구야국(狗邪國)이 주변을 합병하여 결국 가야(伽倻 또는 加耶)로 발전하였다.


          가야(伽倻 또는 加耶)

            금관가야 ( 가락국 ) -- 김해 ( 김수로왕 )
            대가야,
            성산가야,
            아라가야,
            고령가야,
            소가야
            비화가야

            가야의 소국들은 AD 100년 ~ 200년 경에는 김해에 있던 금관가야를 중심으로 전기 가야 연맹을 구성했고,
            AD 400년 ~ 500년 경에는 고령에 있던 대가야를 중심으로 후기 가야 연맹이 구성하였다.
            AD 562년 대가야가 신라에게 병합되며서 가야(伽倻 또는 加耶)는 완전히 멸망하여 버렸다.

            가야는 가장 발전된 철기문화를 가지고 있었으나
            신라와 백제의 중간에서 끊임없이 침략을 당하였고
            또 전투적이지 못한 국민성 때문에 멸망한 것으로 보인다.


        고조선(古朝鮮)시대의 생활 상황

          고조선 시대에는 청동기 문화가 정착된 상태에서 초기 철기 문화가 시작되었다.

          고조선은 요하(遼河 : 랴오허강)지역의 하가점(夏家店)에서 BC 2400 년경의 청동기 유물이 다량 출토되었고,
          중국의 화하족(華夏族)에 의한 황화 문명은 BC 2000 년경에 청동기 유물이 소량 출토되었다.
          이것은 북쪽의 요하(遼河)강 지역에 있는 문화가 남쪽인 황하강 쪽으로 전래 된 것을 증명하고 있다.

          신석기시대에서 청동기로 넘어 가는 과정에서
          우수한 청동기 기술로 주변 여러 나라를 정복할 수 있었던 고조선은 화려한 청동기 시대를 장식하였다.
          그러나 철기 시대로 넘어 가면서 또 다른 기술에 밀려 우리 민족은 잠시 주춤하게 된다.

          이 잠시 주춤 하는 동안에 고조선이라는 나라는 망해 버리지만,
          청동을 잘 다루던 사람들이 철을 잘 다룰수 있는 것은 당연한 이치 이듯이
          다시 부여를 거쳐 고구려가 철기문화의 진수를 보유하면서
          동아시아에서는 아무도 따를수 없는 화려하게 역사의 새로운 페이지를 장식할 수 있었던 것이다.

          지금까지 발굴된 유물들을 보면
          고조선(古朝鮮)의 발달된 청동기 문화가 요하(遼河)강 주변에 있었음이 증명되고 있다.

          이 당시 한반도에서는 수많은 고인돌이 만들어지는데
          신석기시대를 지나 청동기시대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많은 사회적 변화를 겪은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참고 : << 고인돌 >>
           


<< 당시 우리민족의 활동 무대 >>

        당시의 상황을 알아 볼수 있는 좋은 증거물들이 있다

          (1) 철기문화 / 청동기 문화 / 신석기 시대


            그 당시 고조선(古朝鮮)이 중국보다 우수한 철기 문화를 가지고 있었다.

            당시 중국의 중심지는 황하강을 중심으로한 지역이었고
            고조선(古朝鮮)의 중심지는 쑹하강과 요하(遼河)강 지역이었다.

            최근(2007년)에 랴오허 강 유역인 중국 네이멍구(內蒙古) 츠펑(赤峰) 시 일대와
            랴오닝(遼寧) 성 차오양(朝陽) 시 일대에서
            중국 황허(黃河)문명을 훨씬 앞지르는 신석기와 청동기 유적이 대거 발굴됐다.
            요하(遼河)강 주변의 유적지에서 나오는 출토물품들을 조사해 보니까
            황하강을 중심으로 한 지역에서 출토되는 중국 사람들의 문화보다도
            훨씬 앞선 고조선(古朝鮮)의 청동기 문화가 요하(遼河)강 주변에 있었음이 증명되고 있다.

            이번에 발굴된 요하(遼河)강 주변의 신석기 시대 유물은 기원전 7000 연대의 것으로,
            기원전 4500년대 것인 황하강 유역의 양사오(仰韶)문화,,,,
            기원전 5000년대 것의 양쯔강 (장강/長江) 유역의 허무두(河姆渡)문화 보다 훨씬 앞선다.
            즉 요하(遼河)강 주변에 자리 잡은 고조선(古朝鮮)의 문화가
            황하강과 양쯔강을 중심으로한 중국 문화보다 약 2000년이나 앞선 문화라는 것이 증명되는 것이다.

            또 이번에 발굴된 요하(遼河)강 주변의 청동기 시대 유물도 기원전 2000년대의 것으로 판명되어
            황하유역의 기원전 1600 연대의 청동기 문화보다 훨씬앞선 것으로 판명되었다.

            이리고 여기서 출토된 유물들은 중국의 황하강 유역의 유물과는 전혀 다른 문화인 것으로
            만주 지방과 한반도 지역의 유물과 유사한 것이 많은 유물들이 출토된 것이다.
            특히 고조선문화의 상징인 비파형(요녕식)동검이 출토 된 것은
            이 지역이 고조선의 영역이었음을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유물들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러한 유물들의 발굴은 중국사람들이 한 결과였다.

            동북공정 ???
            우끼는 소리하지 말라고 하는 고조선 조상님들의 비웃음소리가 들린다.


<< 청동기 시대 동검의 모습 >>

이런 형태의 동검이 출토되는 것은 고조선 영역의 지역이다.

          (2) 글짜,,, 한자(漢字),,,,

            요즘 중국 사람들이 자기들 글짜라고 하는 한자(漢字) 는 중국 사람들이 만든 것이 아니고
            바로 우리 민족의 조상이었던 고조선 (古朝鮮) 사람들이 만든 것이었다.

            중국 옛날 역사책에 한자(漢字) 는 동이(東夷)족이 만든 것이라고 나온다

            중국어를 한자 ( 漢字) 라고 하는데,,,,,
            왜 한나라 (漢)를 쓰고 한(漢)나라에서 사용한 글이라고 할까 ?
            한(漢)나라 이전에는 글자가 없었는가 ??
            남의 것( 고조선의 것)을 자기 것이라고 할려고 하다보니 시대가 한참 지난 후에 자기 이름을 붙였다.


          (3) 주역 ,,, 연산역,,,

            중국이 자기들 것이라고 하는 주역,,,,,
            우리민족의 전용물이었다.

            우리 민족이 처음에 만든 것이 연산역(連山易)인데,
            이 연산역(連山易) 은 현재 전해지지 않고,,,
            우리 민족이 만든 연산역(連山易)을 기초로 중국의 주(周)나라에서 배껴서 만든 것이 주역(周易)이다.


          (4) 풍수 (風水)

            중국에서 시작되었다고 하는 풍수,,,, 우리 민족이 창안해낸 풍수(風水)이었다.

            우리 민족이 시작한 풍수(風水)를 중국 사람들이 배워서,,,,,
            자신들이 만든 것 같이 우기는데,,,,,,, 천만에 말씀,,,,,

            한가지 예를들면
            중국 당(唐)나라 시대에 양균송( 楊筠松 / 841 ~ 909 )이라는 사람이
            당시로써는 아주 새로운 풍수 학설인 방향을 중요시하는 이기론(理氣論)을 만들어 크게 히트 쳤다.
            또 중국 송(宋)나라의 호순신( 胡舜申 / 1131~1162 ) 이라는 사람이
            그가 저술한 지리신법 (地理神法) 이라는 책에서
            바람(風)과 물(水)의 흐름에 따라 땅의 기(氣)를 12 등급으로 나누어 길흉을 판단하는
            12포태법 (12 胞胎法) 을 창안해 내었다.
            또 중국 청(淸)나라의 조정동(趙廷棟) 이라는 사람이 88향법( 88向法 ) 의 논리를 체계화하였다.

            중국의 풍수학자들이 철저히 믿고 따르는 이런 학설들이 우리나라에서는 전혀 먹혀들지 않는다.

            이유는 간단하다
            2차 방정식,,, 3차 방정식을 풀수 있는 한국의 풍수 실력인데,,,
            1차 방정식을 푸는 공식을 가지고 떠들고 있는 중국 풍수이니까
            한국 풍수학자들은 거들떠 보지도 않는 것이다.

            풍수(風水)는 머리로 배우는 것이 아니고 마음으로 배우는 것인줄 모르는 중국 풍수인 것이다.


          (5) 조선(朝鮮)


            나라이름을 그대로 조선(朝鮮)이라고 하였다.

            이것은 고조선(古朝鮮)이 그대로 유지되면서,
            기자조선 (箕子朝鮮)이든,,,위만조선 ( 衛滿朝鮮 )이든,,, 고조선의 한 변방을 차지 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6) 만리장성


            중국사람들이 얼마나 무서웠으면 만리장성을 쌓았겠나 ???
            당시에 중국을 괴롭힌 나라는 바로 고조선(古朝鮮) 이었다.

            만리장성은 중국인들이 자랑하는 유적지이라고 하지만,
            정식으로 싸워서는 이기기 힘든 상대를,,,,
            어떻게든지 피해보자는 마음으로 건설한 지울수 없는 명백한 역사의 증거물인 것이다.

            참고 : << 만리장성 >>

            BC 2700 연대에 우리나라의 치우 천황에게 전쟁에서 진 이후로 건설하기 시작하여,,,
            고조선이 망하기 100년전쯤인
            기원전 221 년에 중국을 통일한 진시황에서부터 본격적으로 건설하였으며,,,,
            중국의 명(明)나라 (1368-1644) 때에도 대대적인 증축과 함께 보수공사를 하였다.
            4000 년 중국의 역사와 같은 기간동안을 계속 증개축하면서 만리장성을 건설하여 온 것이다.

            4,000 년이 넘는 기간동안
            무엇이 그렇게 겁이 나는지,,, 온백성들이 힘을 다해서 담장을 쳐놓고,,,,
            담장 바깥도 자기 것이라고 우긴다 ???

            동북공정한다고 ???
            만리장성도 없애나 ??? 만리 장성이 있는한 증거는 충분하다.
            죽기 살기로 엄청난 담장을 쳐놓고 ,,,, 담장 안쪽도 내 것이고,, 담장 바깥쪽도 내 것이라고 ????
            말도 안되는 소리하고 자빠졌네,,,,,


      고조선의 멸망

        당시 중국의 상황

          중국은 BC 770년 ~ BC 221 년 사이의 약 500년간을 수많은 나라들이 전쟁을 하는
          춘추 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를 보내는데,
          지금의 북경근처에서 강성해진 연(燕)나라가 북쪽의 고조선을 침략하기 시작했다.

          연(燕)나라의 소왕(昭王: BC 311 년 ~ BC 279 년 ) 때인
          BC 281년 연(燕)나라는 진개(秦開)라는 장군을 앞세워 고조선을 침략해왔다.
          500년간을 춘추 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를 보내면서 전쟁을 하는 기술을 익힌 연(燕)나라의 군대는
          말과 마차를 연결한 전차(戰車)를 이용하고,,, 말을 타는 기마술(騎馬術)을 익혀서,,
          고조선의 중심부인 요하(遼河)강 지역까지 침략해 들어 갔었다.
          큰 타격을 입은 고조선은 동쪽으로 근거지를 옮겨 요동반도 지역인 한반도 북부지역으로 이동하였다.

          BC 222년 진시황의 진(秦)나라가 연(燕)나라를 멸망시키고 BC 221 년에는 중국을 통일했다.

          BC 207 년 진(秦)나라가 망하고,
          중국은 다시 항우가 이끄는 초(楚)나라와 유방이 세운 한(漢)나라가 전쟁을 하여
          BC 202년 유방이 승리함으로써 중국은 다시 한(漢)나라가 통일하게 되었다.

          한(漢)나라 무제(武帝 : 재위 BC 141 년 ~ BC 87 년 )는
          BC 108년 고조선(古朝鮮)의 마지막 혈통인 위만조선(衛滿朝鮮)을 멸망시키고
          그곳에 한사군 (漢四郡)을 설치하였다.


        고조선의 세력이 약해진 원인
        으로는

          (1) 발달된 청동기 문화에 안주하면서 철기 문화를 빨리 받아들이지 못했다.

            고조선에서 시작된 청동기 문화는 지배계층의 독점물로써 활용한 반면,
            남쪽의 중국으로 전파된 청동기 문화는 철기문화로 변화되면서 중국의 기술이 앞섰다.

            중국은 재료를 구하기 어려운 청동기 보다는 재료를 구하기 쉬운 철(鐵)을 이용하여
            변장기 또는 농사에 이용되는 농기구를 개발해 나갔던 것이다.
            중국에서 단조(鍛造) 기술이 발달한 것은 전국시대 말기에 해당한 것으로 보인다.


          (2) 중국의 전쟁 기술 발달

            춘추 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 500년간을 전쟁속에서 보낸 중국은 전쟁 기술이 발달되었다.


          (3) 고조선 각 부족들간의 갈등

            여러 민족들로 구성된 수많은 거수국(渠帥國)들의 단결된 연대가 약했다.

            고조선의 거수국(渠帥國)중에서 부여(夫餘)가 가장 힘이 셌지만,
            모든 거수국(渠帥國)을 장악할 정도로 큰 힘을 발휘하지는 못했다


        고조선의 멸망 과정

          단군에 의한 고조선의 통치는 대략 BC 425 년경부터 힘이 약해지기 시작하여,
          연(燕)나라의 진개(秦開)의 침략을 받아 동쪽으로 패주한
          BC 281 년경에는 단군에 의한 실제적인 통치는 끝났다고 봐야 한다.

          단군에 의한 고조선의 통치력이 상실되자 거수국(渠帥國)끼리 패권을 다투는 경쟁이 격화되었다.
          이 경쟁에서 우세를 점한 것이 부여(夫餘)이다.

          이때 중국에서는 BC 222년 진(秦)나라가 연(燕)나라를 멸망시키고 BC 221 년 중국을 통일했다.
          500년간의 전쟁을 끝낸 진시황은 강력한 통일 정책을 펼쳤다.
          그러나 이것도 잠시 통일된 중국은 14년만에 진(秦)나라가 망하고 ( BC 207 년 ),
          중국은 다시 항우가 이끄는 초(楚)나라와 유방이 세운 한(漢)나라가 전쟁을 하게 된다.
          이 전쟁은 BC 202년 유방이 승리함으로써 중국은 다시 한(漢)나라가 통일하게 되었다.

          BC 222년 연(燕)나라가 진(秦)나라에 멸망한 후
          연(燕)나라 출신의 위만(衛滿)이라는 사람이 자신의 종족 ( 1,000 명 )을 이끌고
          BC 200 년경에 고조선 지역 중에서 기자조선(箕子朝鮮)으로 투항하였다.
          기자조선은 위만(衛滿)에게 중국 ( 당시 한(漢)나라 )과 가장 가까운 서쪽 지역을 지키는 임무를 맡겼는데
          위만(衛滿)은 쿠데타를 일으켜 기자조선(箕子朝鮮)의 준왕(準王)을 축출하고 BC 194년에 왕위에 올랐다.
          이때부터 국호를 위만조선(衛滿 朝鮮)이라 하였다.

          이때 왕위를 빼앗긴 준왕(準王)은 배를 타고 마한(馬韓) 땅으로 들어와 마한 왕(馬韓 王)이 되었다고 하며,
          또 준왕(準王)의 3형제들도 한반도로 넘어와서
          각각 기(奇)씨와 선우(鮮于)씨 그리고 청주 한(韓)씨의 선조가 되었다고 한다.

          위만조선(衛滿朝鮮)은 100년도 못견디고,
          손자인 우거왕(右渠王)때 막강한 세력으로 성장한 한(漢)나라의 침략으로 BC 108년 멸망하게 된다.
          이때 고조선의 거수국(渠帥國)이었던 낙랑, 진번, 임둔(臨屯) 등도 함께 무너졌는데,
          한(漢)나라는 이곳에 한사군(漢四郡)을 설치 하였다.

          그뒤 한(漢)나라에서는 고조선(古朝鮮)의 지역에 한사군(漢四郡)을 설치하였다고 하는데,,,,
          우리나라 역사책에서는 이북의 평양이 있는 근방이라고 하지만,
          지명과 그 유물들이 출토되는 지역을 보면 중국의 북경과 가까운 지역이라고 밝혀졌다.


        역사의 의문점

          한(漢)나라에서는 전쟁에 참가한 장수들을 처벌하고 고조선의 지배층 사람들에게 상을 주었을까 ???

            한사군(漢四郡)에 관한 최초의 기록은 사마천(司馬遷)이 저술한 사기(史記)의 조선열전에 나와 있는데,
            한(漢)나라가 많은 군대를 보내 공격했으나 위만조선은 1년 넘게 무너지지 않았다.

            전쟁에 지친 조선의 지배층이 분열되었는데,
            고조선의 한음(韓陰)ㆍ왕겹(王唊)ㆍ노인(路人) 등은 한(漢)나라로 도망갔고,
            참(參)은 우거왕(右渠王)을 살해했고,
            끝까지 저항하던 성기(成己)마저 살해되자 BC 108년 성(城)이 함락되었다고 하고 있다.

            그리하여 전쟁이 끝나자
            한(漢)나라에 항복했던 위만조선의 지배층은 모두 제후에 봉해졌다.
            그런데 특기할 만한 사실은 전쟁에 참여했던 한(漢)나라 장군들은 모두 처벌을 받았다는 것이다.
            한(漢)나라의 좌장군 순체(荀彘)는 참형을 당한 후 그 시신마저 저잣거리에 버려지는 신세가 되었으며,
            한(漢)나라의 누선 장군 양복(楊僕)은 많은 속전을 바치고서야 겨우 목숨만 건진 채 서인(庶人)으로 전락했다.
            한(漢)나라의 위산(衛山)과 공손수(公孫遂)는 이미 참형에 처해진 뒤였다.

            전쟁후
            전쟁에 참가한 한(漢)나라 장수들은 처벌하였고,,,, 적국의 장수들은 모두 후(侯)로 봉해졌다 ???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
            한(漢)나라가 실력으로 전쟁에서 이긴 것이 아니라
            위만조선의 지배층이 분열해서 항복하는 바람에 한(漢)나라가 운좋게 이기게 되었다는 말이다.


          사마천(司馬遷)은 자신이 살아있을때 일어난 사건인데 한4군의 이름을 왜 적지 않았을까 ???

            사마천 ( 司馬遷 : BC 145년 ~ BC 86 년 )은 자신이 기술한 사기(史記)에서
            BC 108년에 위만조선이 멸망했고, 한(漢)나라는 이지역에 4개의 군을 설치하였다고 적고 있다.

            왜 4개 군의 이름을 적지 않았을까 ???

            한4군의 이름은 사마천 (司馬遷)이 죽은 후 200년 정도 지나서
            반고(班固 : AD 32 년 ~ AD 92 년)라는 사람이 저술한 한서 (漢書)라는 역사서에서 처음으로 등장한다.


          한(漢)나라의 공격으로 고조선이 과연 멸망하였을까 ???

            역사서 어디에도 한(漢)나라가 고조선을 멸망시켰다는 말은 없다.
            한(漢)나라의 공격으로 멸망한 나라는 위만조선(衛滿朝鮮) 이었다.

            위만조선(衛滿朝鮮), 기자조선(箕子朝鮮) 도 고조선의 한 변방에 있었던 조그마한 국가였고,
            BC 108 년 한(漢)나라가 한사군( 漢四郡)을 설치 하기 이전에 그곳에 있었던
            낙랑, 진번, 임둔(臨屯) 도 고조선의 거수국(渠帥國)이었고,,,,
            고조선 안에는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민족도 있었지만 언어와 풍속이 다른 민족도 있었다.
            이들은 국가 연합 형태로 서로 동맹관계를 유지하면서 거수국(渠帥國)의 지위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고조선이 붕괴된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BC 108 년 한사군( 漢四郡)의 설치와 함께 멸망했다기보다는
            고조선의 지배세력이 약해진 후
            삼한(三韓), 부여(夫餘), 비류(沸流), 고구려(高句麗), 낙랑국(樂浪國), 북옥저(北沃沮), 남옥저(南沃沮),
            예(濊), 맥(貊), 신라(新羅), 백제(百濟), 등 여러개 국가로 분열되었다고 보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고조선의 멸망과 그 영향

        고조선의 멸망과 함께 건국된 국가

          중국의 진(秦)나라 ( BC 221 ~ BC 206 년 )와 한(漢)나라 ( BC 202 년 ~ AD 220 년 )

            중국은 BC 770년 ~ BC 221 년 사이의 약 500년간을 수많은 나라들이 전쟁을 하는
            춘추 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를 보내는데,
            고조선이 멸망( BC 238년 )하면서 춘추 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도 끝이 나게 된다.
            BC 221년 중국을 통일한 진시황(秦始皇)이 진(秦)나라를 건설하였다.
            진(秦)나라는 20년정도 있다가 멸망하였다.

            항우와 유방이 싸워서 유방(劉邦)이 이기게 되는데,
            중국을 통일한 한고조(漢高祖) 유방(劉邦)이 세운 나라가 한(漢)나라이다.
            한(漢)나라 무제(武帝 : BC 141∼BC 87) 때에는 주변의 여러나라들을 침략하게 된다.

            한(漢)나라 무제(武帝)는
            BC 108년 고조선(古朝鮮)의 마지막 혈통인 위만조선(衛滿朝鮮)을 멸망시키고
            그곳에 한사군 (漢四郡)을 설치하였다.


          부여 ( 夫餘 : BC 238 년 ~ AD 494 년 )의 건국

            고조선이 멸망하는 시점에서 고조선의 영토였던 중국 쑹화강 유역과 북만주 지역을 중심으로
            BC 238년에 해모수가 부여국(夫餘國)을 건설하였다 --- 북부여(北夫餘)
            해부루왕은 동쪽의 가섭원으로 옮겨 동부여(東夫餘)를 건국하였다.
            졸본(卒本)을 도읍지로 번창한 부여 국가인 졸본부여(卒本夫餘)가 있었다.

            해모수(解慕漱)가 건설한 부여국(夫餘國)을 해모수계(解慕漱系) 고구려(高句麗)라고 하기도 한다.
            많은 중국의 역사책에서 고주몽(高朱蒙)이 고구려(高句麗)를 건설하기 전에
            이미 고구려(高句麗)의 이야기가 나오는 것을 볼수 있는데,
            이때 말하는 고구려(高句麗)는 부여(夫餘)를 말하는 것으로 볼수 있는데,
            부여(夫餘)와 고구려(高句麗)는 같은 계열의 국가라고 볼수 있다.

            중국의 주(周)나라 시대의 역사를 주로 다루고 있는 역사서인 일주서(逸周書)의 내용을 보면,
            중국의 주(周)나라 주무왕 (周武王 ; BC 1169 ~ BC 1116 )이 은(殷)나라 멸망시키고,
            그리고 지금의 산시성(陝西省) 시안(西安) 부근-- 당시의 호경(鎬京) -- 에 도읍을 정하고,
            주변에 있는 종족들을 초청하여 잔치를 벌렸는데
            이때 고구려인인 고이(高夷)가 참석했다고 하는 기록이 남아 있다.

            이것은 BC 1100 년경에 이미 주(周)나라의 수도인 호경(鎬京)에서 멀지 않은 곳에
            고조선의 도읍지였던 곳으로 추정되는 요하(遼河)지역의 홍산(紅山)과 하가점(夏家店)에는
            고구려족들이 세력을 가지고 있었다는 증거이다.

            이들 부여국(夫餘國)들의 관계와 역사서에 나오는 인물들인
            해모수, 해부루, 금와왕, 고구려 동명성왕, 연타(취)발, 고주몽, 유화 부인(고주몽의 어머니) 등의 관계는
            역사서마다 조금씩 다르게 적혀있다.
            하지만 동부여를 건설한 해부루왕과 고구려를 건설한 동명성왕(고주몽:高朱蒙)은
            배다른 형제라고 적고 있는 역사서가 많다.

            원래 동부여(東夫餘) 출신인 고주몽(高朱蒙)은
            졸본부여(卒本夫餘)의 귀족인 연타발의 딸(소서노)과 결혼한 후 졸본부여(卒本夫餘)의 왕이 되었다가,
            BC 58 년 고구려(高句麗)를 건국하게 되었다.
            그리고 고주몽(高朱蒙)은 고구려의 초대왕인 동명왕(東明王) 또는 동명성왕(東明聖王)이 되었다.

            동부여(東夫餘)는 해부루왕, 금와왕, 대소왕으로 왕위가 계승되어 오다가,
            AD 22년 고구려 3대 왕인 대무신왕(大武神王: 재위 AD 18 년 ~ AD 44 년) 의 공격으로
            대소왕(帶素王)은 죽고, 동부여(東夫餘)는 고구려에 항복하고 고구려에 귀속되었다.

            부여국(夫餘國)은
            BC 238년부터 약 200 년간은 고조선의 전통성을 이어 강성한 국가로 발전하였으나,
            고구려가 건국되고 고구려(高句麗)의 세력이 점차 강해지면서 서서히 고구려에 합병되어 갔다.
            285년의 선비족 침공으로 부여국(夫餘國)의 왕 의려가 죽고, 수도가 점령당하는 등 국가적 위기를 맞았고,,,
            346년 전연의 침공으로 인해 심한 타격을 입었고,,,
            494년 고구려의 전성기였던 21대 왕인 문자명왕(文咨明王 : 재위 492년~519년) 때에 
            부여국의 왕(王)은 고구려에 항복하고 부여국(夫餘國)은 완전히 멸망하였다.

            고조선(古朝鮮)의 정통성을 부여( 夫餘 )가 이어받고
            또 부여( 夫餘 )의 정통성을 고구려(高句麗)와 백제( 百濟 )가 이어받아
            또 다른 우리 민족의 역사를 이어가고 있는 것이다.


          해모수계(解慕漱系) 고구려

            BC 238년에 해모수(解慕漱)가 건설한 부여국(夫餘國)을
            해모수계(解慕漱系) 고구려(高句麗)라고 하기도 한다.

            중국 옛날 역사책에서는
            졸본 부여(卒本夫餘)와 졸본 고구려(卒本 高句麗)가 혼용되어 사용되고 있으며,
            부여(夫餘)와 고구려(高句麗)도 같은 나라 처럼 사용되고 있다.


          고주몽(高朱蒙) 고구려

            고주몽이 건설한 ( 고주몽 : 高朱蒙 )고구려(高句麗)는 BC 58년에 건설되었다.


          낙랑국 ( 樂浪國 )

            고조선의 멸망으로 생긴 국가임
            지금의 이북 평안도 지역에 BC 200 년경부터 있었던 고대 국가

            낙랑국(樂浪國)은
            BC 28년 신라를 침범하였으며,
            AD 37년 고구려의 대무신왕의 공격을 받아 멸망하게 되었다.
            이때 고구려왕의 아들인 호동왕자와 낙랑국 왕의 딸인 낙랑공주의 이야기가 나오게 된다.
            그리고 이때 낙랑국(樂浪國)의 5,000 명의 사람들이 신라에 가서 투항하였다.

            이 낙랑국(樂浪國)은 한(漢)나라가 고조선(古朝鮮)의 지역에 설치한
            한사군(漢四郡)의 하나인 낙랑군(樂浪郡)과는 전혀 틀리는 나라이다.


          옥저 ( 沃沮 )

            고조선의 멸망으로 생긴 국가임

            지금의 함경도 지역에 BC 200년 경부터 있었던 고대 국가
            AD 56년에 고구려에 복속되었다.


          동예 ( 東濊 )

            고조선의 멸망으로 생긴 국가임

            예(濊)는 원래 고조선의 제후국으로 지금의 중국 요서지방의 난하 유역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고조선(위만조선)이 멸망한 후 한(漢)나라의 지배를 피해 동으로 이동하여
            지금의 강원도 강릉 일대에 정착했다고 한다.
            그래서 이때부터 예(濊)라고 하지 않고 동예(東濊)라고 불렀다고 한다.

            중국사람이 쓴 역사서인 삼국지 (위지동이전)에 따르면
            동예(東濊)에는 당시 2만호의 집이 있었다고 한다.

            후에 고구려의 지배를 받다가 신라에 흡수되어 버렸다.


          마한(馬韓)의 목지국 ( 目支國 )

            BC 194년경에 중국 북쪽지역의 연(燕)나라 사람인 위만(衛滿)이 기자조선 (箕子朝鮮)을 공격할때
            기자조선 (箕子朝鮮)의 41대 왕(王)인 준왕은 위만(衛滿)을 피하여 바닷길로 달아나,
            한반도의 남부 지역에서 목지국(또는 월지국)을 건설하였다고도 한다.

            즉 목지국(目支國)은 기자조선 (箕子朝鮮)의 멸망으로 생긴 국가임


          백제(百濟)의 건국

            BC 18년 현재의 한강 하류의 하남위례성(河南慰禮城)에 도읍을 정해 건국하였고,
            초기의 국가이름은 남부여(南扶餘)였으며,
            660년 신라와 당나라의 연합 공격을 받아 멸망하였다.


          신라(新羅)의 건국

            BC 57년에 건국하여 935년에 고려의 왕건에게 항복하여 멸망하였다.


        위만 조선 ( 衛滿朝鮮 )의 멸망

          위만 조선 ( 衛滿朝鮮 )은 BC 194년에 건국하여 100년도 못견디고 BC 108년에 멸망함

          고조선(古朝鮮)은 중국의 한(漢)나라의 한무제(漢武帝)가 6만의 육군과 7천의 수군을 파견하여,
          고조선의 수도 왕검성을 침공해 오자 1년간 저항하였으나 패배하고 망해 버린다.

          그뒤 한(漢)나라에서는 고조선(古朝鮮)의 지역에 한사군(漢四郡)을 설치하였다고 하는데,,,,
          우리나라 역사책에서는 이북의 평양이 있는 근방이라고 하지만,
          지명과 그 유물들이 출토되는 지역을 보면 중국의 북경과 가까운 지역이다.


        한사군
        (漢四郡) 설치

          고조선(古朝鮮)시대의 마지막 이었던 위만 조선( 衛滿朝鮮 )이 한(漢)나라의 공격으로 BC 108년에 망한 뒤
          한(漢)나라에서는 고조선(古朝鮮)의 지역에
          낙랑군(樂浪郡), 임둔군(臨屯郡), 진번군(眞番郡), 현토군(玄菟郡)의
          한사군(漢四郡)을 설치하였다고 하는데,,,,
          위치가 어디였느냐가 문제가 된다.

          첫째 위만조선의 영토가 한반도 바깥이었으므로
          한사군(漢四郡)의 위치도 한반도 바깥에 있었다는 주장하는 학자들이 많다.

          둘째 중국의 옛날 지도에 나오는 지명들을 보면 이들 이름이 북경근처에 있다.
          그러므로 한사군(漢四郡)은 한국의 이북 지방이 아닌 중국의 북경(뻬이징)근처에 있었다.

          셋째 중국의 이들지역에서 발굴되는 유물들이 이곳이 한사군 (漢四郡) 지역이었음을 임증하고 있다.

          낙랑군(樂浪郡)

            25개 현 / 6만 2천 8백 12가구 / 인구는 40만 6천 7백 48명 이었다.


          현토군(玄菟郡)

            18개 현 / 4만 5천 6가구 / 인구는 22만 1천 8백 45명이었다.


          우쨌든 한사군 (漢四郡) 은
          BC 82년에 이르러 진번군은 낙랑군에 편입되고, 임둔군은 현도군에 편입되었다가,
          AD 313년에 이르러 낙랑군이 고구려에게 점령당하였고,
          AD 317년 현토군도 고구려에 점령되어
          한사군 (漢四郡) 은 멸망하였다.


      중국의 고대 왕조

        삼황 오제 ( 三皇 五帝 ) 시대

          중국인들이 자랑하는 삼황 오제
          삼황은,,,,,복희(伏羲), 여와(女娲), 신농(神農)
          오제는,,,,,황제(黃帝), 전욱(颛顼), 제곡(帝喾), 당요(唐堯), 우순(虞舜) 

          태호 복희(BC3528∼BC3413)는
          배달국(倍達國)의 환웅(桓雄) 시대때 5대 태우 환웅(桓雄)의 12번째 막내 아들로 태어난
          우리나라 민족 ( 동이족/東夷族 ) 이었던 것이다.
          태호복희
          (伏羲)가 우리나라 사람이었다는 사실이 기록되어 있는 것은
          한국의 역사책 뿐아니라 중국의 역사책에서도 그렇게 기록되어져 있다

          삼황 오제의 말기인 요(堯), 순(舜), 우(禹) 임금 시절이 중국에서는 가장 편안한 시절이었다고 한다.
          이때 우리나라에서는 단군(檀君)이 고조선(古朝鮮)을 세운다 ( BC 2333 년 )

          실제 중국에서는 BC 5,000 년경에 벼 농사를 한 흔적이 황하강과 양쯔강 주변에서 발견되고 있다


        하 (夏)왕조 ( BC 2070 ~ BC 1766 )

          중국 전설상의 가장 오래 된 왕조로 본다.
          삼황 오제의 마지막 시대인 요(堯), 순(舜), 우(禹) 임금 시절을 거치고,,,,
          우(禹) 임금부터 시작된 세습왕조를 하(夏) 나라라고 말한다.

          하(夏) 나라는 약 300 년간 17 명의 임금이 나라를 다스렸다.
          하(夏) 나라의 마지막 왕은 걸(桀) 이라고 하는데,,, 매희(妹喜)라는 미녀에 빠져서 나라를 망하게 한다.


        은 (殷)왕조 ( BC 1766 ~ BC 1027 ) / 상(商) 왕조

          실제 유물과 유적을 발굴하여 은(殷) 나라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는 왕조이다.

          은(殷) 나라를 건설한 사람은 설이다.
          700년간 30명의 왕이 나라를 다스리다가
          마지막 왕인 주(紂)왕이 말희라는 여인과 주지육림(酒池肉林)에 빠져 정사를 돌보지 않아서
          주(周) 나라의 주무왕에게 멸망하게 된다.

          은나라는 읍제국가였고 신정정치를 펼쳤다.
          은나라 수도의 유적으로 알려진 장소에서는 갑골문자를 새겨 놓은 귀갑(龜甲)과 우골(牛骨)이 다량 발견되었다.
          갑골문자이란 거북이와 큰 사슴의 뼈를 이용하여 글짜를 새겼다.


        주(周) 왕조 ( BC 1122 ∼ BC 256 )

          봉건제에 의해 친척을 제후로 봉하고 유사시 무력을 동원하도록 하여 강력한 무력국가를 만들었다.
          주역(周易)의 기초를 만들었다.

          중국의 서쪽지역에서 세력을 구합하한 주문왕 (周文王)은 주(周)나라를 세우고
          그리고 그 아들인 주무왕 (周武王 ; BC 1169 ~ BC 1116 ) 은
          허난성(河南省) 목야(牧野)에서 은(殷)나라의 마지막 임금인 주왕(紂王)의 대군을 격파하여 은나라를 멸망시키고,
          그리고 지금의 산서성(陝西省) 서안(西安) 부근-- 당시의 호경(鎬京) -- 에 도읍을 정했다.

          주(周)나라는 서주(西周 : BC 1122년 ~ BC 771년 ) 와 동주(東周 : BC 771 년 ~ BC 256 년 )로 나뉘어 지는데.

            서주의 수도는 산서성(陝西省) 서안(西安) -- 장안 (長安)이었고,
            동주의 수도는 낙양 (洛陽) 이었다.


        춘추전국시대 ( BC 770년 ~ BC 221년 )

          제자백가의 활동 --- 공자(孔子)의 출현

          많은 학자들이 산동반도 출신인 공자(孔子)도 중국사람이 아닌 동이족(東夷族)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진 (秦) ( BC 221 ~ BC 206 년 )

          기원전 221년 중국 최초의 통일국가
          진시황 (秦始皇)
          중앙집권적 전제정치 확립, 문자(한자/漢字)사용, 화폐 사용, 만리장성 축조,

          미국에 거주하는 중국인 물리학자인 주쉐이위안 (朱學淵) 이라는 사람이 쓴 책의 제목이
          << 진시황 (
          秦始皇)은 몽골어를 말한 여진인(女眞人) 이었다 >> 이다.
          중국 사람들도 진시황 (
          秦始皇)을 중국사람이 아닌 동이족(東夷族)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한 (漢) ( BC 202 년 ~ AD 220 년 )

          기원전 202년 평민 출신 유방이 호족 출신 항우를 무찌르고 장안(시안)을 도읍으로 건국
          서기 220 년까지 약 400년간 유지된 통일국가
          유교의 발달
          중국의 4대 발명 : 종이, 화약, 나침반, 인쇄술
          실크로드 개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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