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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와 발해의 멸망으로 잃어 버린 만주땅

      만주 지역을 놓고 한국과 중국이 벌인 전쟁


<< 만주지역을 놓고,,, 중국과 한국의 피터지는 전쟁 >>

        BC 300년 중국의 연(燕)나라의 진개(秦開)라는 장수가 고조선(古朝鮮)을 침략하여
        고조선의 중심부인 요하(遼河)강 지역까지 침략해 들어 갔다.

        BC 108년 후한(後漢)이 고조선(古朝鮮)= 위만조선(衛滿朝鮮)을 멸망시키고
        그곳에 한사군 (漢四郡)을 설치하였다.

        BC 220년 후한(後漢)멸망

        AD 246년 위(魏)나라의 관구검이 고구려를 침공하였다.
        AD 259년 위(魏)나라의 위지해(尉遲楷)가 고구려를 침공하였으나 대패하였다.

        293년 선비족(鮮卑族) 모용부(慕容部)의 부족장이었던 <모용외>가 고구려를 침입하였으나 실패하였다.
        296년 <모용외>가 고구려를 다시 침입하였으나 또 실패하였다.

        313년 고구려(高句麗)가 낙랑군과 대방군 점령
        317년 고구려(高句麗)가 현도군을 점령

        342년 전연(前燕)의 모용황(慕容皝)이 직접 군사를 이끌고 고구려를 침략
        385년 고구려가 후연(後燕)의 요동(遼東)지역을 공격하여 요동과 현토를 쳐부수고 포로 1만 명을 생포하였다.

        400년 후연(後燕)이 고구려를 공격하여 요동(遼東)지역을 탈환했다.
        402년 고구려가 요동(遼東)지역과 요령성 조양시(遼寧省朝陽市) 지역을 다시 탈환
        406년 후연(後燕)의 모용희(慕容熙)가 고구려의 요동(遼東)지역을 공격했지만 실패했다.

        598년 수(隋)나라는 30만 대군을 동원하여 고구려를 침략하였지만 5만의 고구려군에 대패하였다.
        612년 수(隋)나라의 왕(양제)이 직접 군사 113만명을 거느리고 고구려를 침략하였으나 실패하고 퇴각하였다.
        613년 수(隋)나라의 왕(양제)이 직접 고구려를 침략하였으나 또다시 실패하였다.
        614년 수(隋)나라의 왕(양제)이 직접 고구려를 침략하였으나 또다시 실패하였다.

        618년 수(隋)나라 멸망

        642년 당(唐)나라의 군대가 만리 장성을 넘어 고구려를 침략하였으나 고구려의 <연개소문> 장군이 막아냈다.
        645년 당태종 이세민이 직접 30만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를 침범하지만
        안시성에서 <양만춘> 장군에게 처참하게 패하였다.
        649년에 당태종 이세민(唐太宗 李世民)이 세상을 떠난다. -- 고구려 침략을 중지하라고 유언을 함

        668년 고구려(高句麗) 멸망


      고구려(
      高句麗) 의 멸망

        고구려 건국

          중국 당(唐)나라 시대에 적은 역사책에서는
          고구려(高句麗)의 건국을 해모수가 건설한 부여국(夫餘國 : BC 238년 건국)부터 계산하고 있다.

          참고 : 고조선(古朝鮮)의 멸망과 함께 건설된 부여국(夫餘國)

          하지만 우리가 보통 고구려라고 말하는 (고주몽)고구려(高句麗)만을 생각하면
          고주몽이 부여에서 갈라져나와 졸본(卒本)에서 세운 (고주몽)고구려(高句麗)의 건국 연도는 BC 58년 이었다.

          많은 역사책에서는 BC 58년 이전에도 고구려(高句麗)의 이야기가 나오는 것을 볼수 있는데,
          이때 말하는 고구려(高句麗)는 부여(夫餘)를 말하는 것으로
          부여(夫餘)와 고구려(高句麗)는 같은 계열의 국가라고 볼수 있다.


        고구려 멸망

          660년 신라와 당나라의 연합 공격을 받고 백제(百濟)는 수도 사비성이 함락되며 멸망하였다
          백제(百濟)의 멸망으로 신라와 당나라는 고구려 타도에 전력을 기울이면서
          또 다른 외부 세력을 걱정할 필요가 없어졌으니 660년부터 668년간 9년간의 장기전쟁으로 갈수 있었다.

          668년(보장왕 27) 신라와 당나라의 나당 (羅唐) 연합군과의 싸움에서 패함으로써 멸망하였다.
          고주몽으로부터 시작하여 700년간 지속된 고구려는 멸망하였다.

          김인문(金仁問)이 이끄는 27만의 신라(新羅)군과
          이적·설인귀(薛仁貴)가 이끄는 50만명의 당(唐)나라군,
          이렇게 대규모로 연합한 나당(羅唐)연합군 이 평양성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멸망 과정 & 원인

          (1) 16년간 ( 598년 ~ 614년 ) 수(隋)나라와 4차례에 걸친 전쟁

            수나라는 598년, 612년, 613년, 614년에 각각 침공하기에 이른다.
            수나라의 두 번째 침공 당시 을지문덕 장군이 살수에서 활약하여 큰 승리를 거두었다. (살수대첩)

            수(隋)나라가 만리장성을 넘어 고구려를 침략하여 16년동안 전쟁을 치루었지만
            한번도 이기지 못하고 패배하여 결국 나라까지 망하게 된 것이다.


          (2) 당(唐)나라와 3차례에 걸친 전쟁

            642년 당(唐)나라의 군대가 고구려를 침략하였으나 고구려의 연개소문 장군이 막아냈다.

            645년 당태종 이세민이 직접 30만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를 침범하지만
            안시성에서 고구려의 명장 양만춘 장군에게 처참하게 패하고 말았다.

            660년 백제를 멸망시킨 당나라는 이번에는 << 고구려 차례이다 >> 라고 하면서
            661년 ~ 662년 당나라 군대가 고구려를 침입 --- 연개소문이 막아냄


          (3) 오랜 전쟁으로 농사지을 땅이 못 쓰게 돼 백성들이 가난해진 것도 고구려 멸망의 한 원인

          (4) 660년 백제(百濟)의 멸망

            백제(百濟)의 멸망으로 신라와 당나라는 고구려 타도에 전력을 기울일 수 있었다.

            백제의 멸망,,,,
            신라와 당나라의 연합,,,
            주변의 다른나라들을 이용하는 체계가 전혀되어 있지 못한 고구려의 대외정책이 엉망이었다.


          (5) 연개소문의 20년 장기 독재 정치 체제는 민심을 혼란시켰다.

            연개소문은 병법 등 군사 문제에 있어서 능력이 뛰어난 인물이었지만,
            자신과 생각이 다르다는 이유로 왕(영류왕)과 많은 대신들을 죽였고,
            자신을 지지하는 인물 위주로 정치를 이끌었기 때문에,
            여러 사람의 지혜를 모으지 못하고, 편향된 정책으로 민심을 잃었다.


          (6) 666 년 연개소문의 죽음

          (7) 연개소문의 죽음후 남생(男生), 남건(男建), 남산(男産) 세 아들 사이에 권력 다툼이 있었다.

            나당(羅唐)연합군 고구려를 공격해오고 있는 상황에서
            형(남생)과 아우( 남건 + 남산) 사이에 권력다툼으로 서로 싸움을 하는 전쟁을 하였으며
            이 전쟁에서 형(남생)이 지게 되자,
            적국인 당(唐)나라에 자신을 도와 달라고 부하를 보내게 되고,
            당나라가 자신을 돕겠다고 하자, 형(남생)은 666년 6월에 나라를 배반하고 당(唐)나라에 투항했다.
            당(唐)나라에 투항(항복)한 형(남생)은 당나라 군대의 향도가 되어 고구려 멸망을 도왔다.


          (8) 연개소문의 아우 연정토(淵淨土)는 12성(城)을 가지고 신라에 투항하였다.

          (9) 신라와 당나라의 나당 (羅唐) 연합군의 공격으로 668년 9월 26일 고구려는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평양에 있던 보장왕의 항복으로 전뱅은 끝이나고 고구려는 멸망하였지만,
            당시 안시성을 포함한 많은 고구려의 성(城)들은 아직도 항복하지 않고 있었다.


          이런 어처구니 없는 고구려의 멸망을 지켜본 우리 민족은
          노래로 허망한 마음을 달래는데,,,,,,,,,,,,,, 그노래가 바로 ,,,,,, << 아리랑 ( Arirang ) >>


        고구려 멸망후의 정세

          (1) 당(唐)나라의 통치

            668년 당(唐)나라는 고구려 수도였던 평양에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를 두고
            설인귀로 하여금 통치하게 하였다.

            당(唐)나라 군대 2만명을 주둔시켰다.


          (2) 고구려 멸망 당시 고구려 가구수는 : 69만 7,000 가구였다.

          (3) 669년 고구려의 2만 8,200 가구를 당(唐)나라 내지로 강제 이주시켰다.

            고구려의 저항을 막기위한 수단이었음
            항복한 고구려 마지막 왕이었던 보장왕도 함께 강제 이주 되었다.


          (4) 고구려의 부흥운동

            당나라의 지배에 대항하는 고구려 유민들의 강력한 저항이 일어난다.
            669년 검모잠(劍牟岑) 일파의 부흥운동이 일어났으며,
            안시성 등지에서 고구려 유민들의 부흥운동이 일어난다.

            신라는 당에 저항하는 고구려 유민들의 부흥운동을 지원하였다.
            670년에는 신라 장군 설오유(薛烏儒)와 고구려 장군 고연무(高延武)가 이끄는 연합군이
            압록강을 넘어 당(唐)나라 군사를 공격하였다.


          (5) 고구려 부흥운동의 실패

            고구려 유민의 부흥운동은
            671년 안시성이 함락되고, 673년 호로하(瓠瀘河)에서 부흥군이 패배하자
            고구려 남부의 유민들이 신라로 넘어감으로써 사실상 부흥운동은 실패로 끝난다.


          (6) 신라(新羅)와 당(唐)의 전쟁

            신라와 당나라 간의 전쟁은 676년 매초성 전투와 기벌포 해전에서
            당군이 패배하면서 일단락되었다.

            당(唐)나라는 안동도호부를 요동으로 옮기고 반도에서 철수했으며,
            대동강 이남의 고구려 영역과 주민은 신라에 귀속케 되었다.


          (7) 요동지역 고구려 유민의 강제 이동

            668년 고구려의 멸망으로 요동지역을 포함한 옛 고구려 영토에 살았던 상당수의 유민들은
            신라로 넘어 오기도 하였고,,,,,,
            몽고고원의 돌궐 영내로 이주해 가기도 하였고,,,,,
            또 669년에는 당나라 내지로 강제 이주 당하기도 하였다.

            676년에는 당나라로 강제 이주되었던 고구려 유민들을 다시 요동지역으로 복귀시켰다.
            복귀한 고구려 유민들은 다시 고구려 부흥운동을 하게 되자
            당나라에서는 대규모로 이들 유민들을 당나라 내지로 다시 강제 이주시켰다.

            나라를 잃고 강제 이주 당하는 우리 민족이 불렀던 노래가 바로 ----- << 아리랑 ( Arirang ) >>

            698년 당나라의 영주(營州) 부근으로 강제 이주 당한 고구려 유민들이
            거란족의 반란으로 중국 당(唐)나라 정부의 통제가 허술한 틈을 타서 집단으로 탈출하여
            만주에서 발해(渤海)를 건국하게 된다.


          (8) 발해 ( 渤海 : 698년 ~ 926년 )의 건국

            고구려가 멸망한 지 약 30년 뒤인
            698년에 만주와 연해주 일대에 기반을 둔 고구려 유민과 속말말갈 세력이 힘을 합쳐
            대조영이 발해 (渤海)를 건국하였다.

            만주에서 당나라 세력이 쇠퇴해진 틈을 타서 건국한 발해는
            만주지역에 흩어져 있던 고구려 유민들을 급속히 규합하여 세력을 넓혀 나갔다.

            698년 발해(渤海) 건국 당시 가구 숫자는 10여 만 가구였다고 한다.


      발해(渤海)의 멸망

        발해(渤海)는 거란족이 세운 요(遼)나라의 침략을 받아 926년에 멸망하였다.

        발해(渤海)의 멸망 원인

          (1) 요(遼)나라의 건국 ( 907 년 )

            당나라의 쇠퇴를 계기로 거란족(契丹族)의 우두머리인 야율아보기(耶律阿保磯 : 872년 ~ 926년)가
            지금의 중국의 네이멍구 자치구를 중심으로 한 만주지역에서 요(遼)나라를 건국하였다.

            요(遼)나라를 건국한 초대 황제인 야율아보기(耶律阿保磯 : 872년 ~ 926년)는
            건국 초기( 907년 ) 부터 917년까지 당시 발해(渤海)의 영토이었던 요동지역을 자주 침략하게 된다.

            919년에는 요(遼)나라에서 요동지역에 대한 대규모 침략 전쟁을 벌리는데, 이에 대항하여
            924년에는 발해(渤海)가 요(遼)나라의 요주를 공격해서 함락시키고, 거란인을 포로로 잡아 오기도 했다.

            925년 요(遼)나라 군대가 발해(渤海)의 부여성을 함락시키고
            926년에는 발해(渤海)의 수도인 상경용천부를 포위 공격하여
            발해(渤海)의 마지막 왕인 대인수의 항복으로 228년을 지속하여 온 발해(渤海)는 멸망하게 된다.

            거란족이 세운 요(遼)나라는
            1125년 여진족(女眞族)이 세운 금(金)나라의 공격을 받아 멸망하였다.


          (2) 백두산의 화산폭발

            어떤 학자들은 백두산의 화산 폭발이 발해(渤海)를 망하게 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런 주장은 정확한 근거가 없다.
            특히 발해가 망한 것은 926년인데 ,,,, 발해가 망하고 난후 20년 뒤인 946년에 백두산 화산이 폭발하였다.
            앞뒤가 맞지 않은 주장이다.

            실제 백두산은 946년과 947년에 대규모로 화산이 폭발하였다.

            백두산이 폭발한 946년은
            고려(高麗)에서는 제 3대 임금인 정종( 定宗 --- 재위 : 945년 ~ 949년 )이 등극한 다음해이었고,
            거란족이 세운 요(遼)나라는 제 2대 임금인 요(遼) 태종(太宗 --- 재위 : 927년 ~ 947년)이 통치하고 있었고,
            중국 남쪽에서는 송(宋)나라가 건국되기 전의 오대십국 시대 ( 五代十國時代 ; 907년 ~ 960년 )이었다.


          (3) 지배계층의 무능력

            발해(渤海)의 계층간의 불협화음,,
            여러 종족과 신분 제도의 모순으로 구심점이 없었고,,,
            거란 침공에 대비한 대외 정책의 미비와 자기들끼리의 정치적 내분


          (4) 한반도는 후삼국 시대 ( 後三國時代 : 892 년 ~ 936 년 )

            892년 견훤이 후백제를 건국하였고

            901년에는 궁예가 후고구려를 세웠고,

            918년에는 고려(高麗) 태조 왕건이 궁예를 몰아내고
            송악 ( 현재의 개성 )에 도읍을 정하고 고려(高麗)를 건국하였고,

            936년 고려(高麗) 태조 왕건은 후삼국을 통일하고 한반도에 통일국가를 만들었다.

            발해가 요(遼)나라와 저투를 벌이던 907년부터 발해가 망한 926년 사이에는
            한반도에서도 후삼국이 서로 전투를 하고 있는 상황이어서
            발해를 도와줄 여력이 없었다.


        발해(渤海) 멸망 후의 발해의 부흥운동과 함께 생긴 나라들

          후발해 (後渤海 : 927 년 ~ 934 년) 7년 왕국

            발해(渤海)가 요나라에 의해 멸망된 뒤에 발해의 왕족이었던 대(大)씨들이 세운 나라이다.

            934년에는 요나라 (거란)의 공격으로부터 시작된 후발해 (後渤海) 정부의 내분으로
            열만화가 왕위에 오르게 되고, 열만화는 후발해 (後渤海)라는 이름을 사용하지 않고
            정안국으로 이름을 바꾸어 정안국 (定安國)을 건국하게 된다.


          정안국 (定安國 : 936 년 ~ 986 년) 50년 왕국

            934년 후발해(後渤海) 멸망후 열만화가 왕위에 오르면서 정안국을 건국하였다.

            976년 국가의 내부 사정으로 성이 다른 오현명이 왕위를 이었다
            986년 거란족이 세운 요(遼)나라의 침입으로 멸망 했다.


          흥요국 ( 興遼國 : 1029 년 - 1030 년) 2년 왕국

            1029년 발해(渤海) 대조영의 후손인 대연림이
            거란(요나라)의 통치에 대한 민중의 불만을 이용해 발해(渤海)의 부흥을 목표로 건국한 나라였다.

            1030년 흥요국에 대한 고려의 지원 거부와 부하의 배신으로 거란(요나라)의 침입으로 멸망 했다.


          대원국/대발해(大元國/大渤海 : 1116 년 ~ 1116 년 ) 1년 왕국

            대원국/대발해(大元國/大渤海)는
            발해의 멸망 뒤에 발해(渤海)의 귀족이면서 거란(요나라)의 지방 관리였던 고영창이 세운 나라이다.

            거란족이 세운 요(遼)나라의 침입은 잘 막아 냈는데,
            여진족(女眞族)이 세운 금(金)나라의 공격을 받아 멸망하였다.


        발해(渤海) 멸망의 결과

          만주 대륙의 땅을 상실

            발해(渤海) 유민들의 부흥 운동마저 실패함으로써
            우리 민족은 수천년동안 우리민족의 활동 무대였던 만주 지방에 대한 지배력을 상실하게 되었다


          발해 유민의 고려(高麗) 망명

            발해가 망하기 1년전인
            925년에는 ( 高麗 太祖 8년 ) 대규모 발해인들의 고려(高麗) 망명의 기록이 있다
            특히 발해의 高官과 武官職의 주요 인물들이 대거 망명한 기록들이 많다.

            발해인들의 고려(高麗) 망명은 발해의 부흥운동을 하던 나라들이 망할 때에도 있었다.
            즉 정안국 (定安國), 흥요국(興遼國), 대원국/대발해(大元國/大渤海)이 망했을 때에도
            발해인들의 고려(高麗)로의 망명한 기록이 많이 나타난다.


      만주 대륙의 땅 수복의 기회

        고려 ( 高麗 : 918 년 ~ 1392 년 )의 북진 정책

          고려(高麗) 태조 왕건의 북진 정책(北進 政策)

            936년 분열된 후삼국을 통일한 왕건은
            옛 고구려 영토를 모두 수복하겠다는 원대한 목표를 가지고 북진정책을 추진하였다.

            황해도 북쪽과 평안도 일대가 황폐하여 거란족이 자주 출몰하여 침략을 함으로
            평양을 중심으로 한반도 남쪽에 있는 사람들을 이주시키고
            평양을 북진정책의 전초기지로 활용했다.
            이때 고려의 영토는 대동강에서 청천강까지 확장되었다

            942년 요(遼)나라에서 낙타 50필을 보내자,
            고려는 낙타는 굶겨 죽엿고 사신은 섬으로 유배시켰을 정도로
            발해를 멸망시킨 요(遼)나라 ( 916 년 ~ 1125 년 )와는 적대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가,
            당(唐)나라가 멸망한 후 약 60년동안 오대십국 시대 ( 五代十國時代 ; 907년 ~ 960년 )를 통일한
            송(宋)나라가 건국되자 고려(高麗)에서는
            중국에 있는 송(宋)나라 ( 북송 : 960년 ~ 1127년 / 남송 : 1127년  ~ 1279년 )와는 친숙한 관계를 유지했다.


          거란--요(遼)나라의 침입

            거란족이 세운 요(遼)나라( 907 년 ~ 916년 ~ 1125 년 )는
            926년 발해를 멸망시켰고,
            986년에는 발해의 부흥운동으로 일어나서 50년간 지속된 정안국 (定安國)을 멸망시켰다.

            요(遼)나라는 중국 남쪽에있는 송( 북송--北宋 : 960년 ~ 1127 년 )나라를 치기 위해서
            한반도에 있는 고려(高麗)가 자신들의 후방을 공격 할까 염려되었다.
            고려(高麗)의 북진 정책(北進 政策)과 친송정책(親宋政策) 에 대한 불만으로
            요(遼)나라는 3차례에 걸쳐 고려(高麗)를 침입한다.

            993년 (고려 성종 12년) 1차 침략

              요(遼)의 소손녕이 80만의 대군을 이끌고 침략해 오자 고려는 박양유·서희 등을 보내 이를 막았다.
              서희의 단판 외교로 압록강 동쪽의 강동 6주를 획득했다.
              이로써 고려의 영토는 압록강까지 진출하였다.


            1010년 (고려 현종 1년) 2차 침략

              요(遼)의 성종 임금이 직접 40만 대군을 거느리고 침략해 왔다.


            1018년 (고려 현종 9년) 3차 침략

              요(遼)나라의 소배압이 10만 대군을 이끌고 침략해 오자
              고려는 강감찬을 상원수, 강민첨을 부원수로 삼아 20만 대군으로 대비하였다.

              강감찬의 귀주 대첩 -- 침략군 10만명 대부분이 사살됨


            고려(高麗)를 정복하지 못한 요(遼)나라는
            중국 남쪽의 송( 북송--北宋 : 960년 ~ 1127 년 )나라를 본격적으로 치지 못하게 되었다.

            1115년 만주에 거주하고 있던 여진족들이 금(金 : 1115년 ~ 1234년)나라를 건국하였다.

            고려(高麗)를 정복하지 못한 요(遼)나라는
            1125년 여진족이 세운 금(金)나라의 공격을 받아 멸망하였다.


          여진 정벌과 9성 개척 ( 1107 년 )

            1103년(숙종 8년) 여진족들이 함흥까지 침략을 해왔다.
            1104년 고려군이 여진족 정벌에 나셨으나 실패한다.
            실패의 이유는 여진족은 기마병이었고 고려군은 보병이었기 때문에 전투에서 이길수가 없었다.

            고려에서는 윤관(尹瓘)으로 하여금 여진 정벌을 위해 별무반이라고 하는 특수부대를 창설하게 하였다.
            이렇게 여진 정벌의 준비를 완료한 윤관(尹瓘) 장군은
            1107년 여진을 정벌하고 정벌한 지역에 9성을 축조하였으며,
            이곳에 남쪽으로부터 백성을 이주시켜 이주한 백성들이 이곳을 개척하면서 살게 되었다.

            고려군이 이렇게 함흥지역의 함흥평야를 포함하여 함경도일대를 석권하게 되자
            그곳을 근거지로 살고 있었던 여진족들이 반발하여
            1108년초에는 여진족들이 다시 침략하여 왔으나 고려의 군사들이 여진족의 군대를 물리쳤다.
            1109년 여진과 고려가 화친하면서 윤관(尹瓘)이 개척한 9성을 여진족들에게 다시 돌려 주었다.

            그후 여진족은 더욱 강성해져 만주 일대를 장악하였고,
            거란족이 세운 요(遼)나라가 세력이 약해지는 기회를 잡아 결국 여진족들은 거란의 지배에서 벗어나고,
            아골타(阿骨打)라는 사람이 1115년에 수도를 지금의 베이징으로 하여 금(金)나라를 건국했다.


          묘청(妙淸) 의 난 ( 1135년 ) --- 금(金)나라 정벌론

            서경( 현재의 평양 )에서 출생한 고려 말기의 승려이다.

            고려 17대 임금이었던 인종(仁宗 : 재위: 1122년 - 1146년)때
            정권을 잡고 있었던 세력들이 서로 대립하면서 파벌싸움을 하게 되었다.
            보수파 --- 김부식(金富軾)을 중심으로 한 보수적 관리
            개혁파 --- 묘청(妙淸)을 중심으로 한 지방 출신의 개혁적 관리

            김부식(金富軾)을 중심으로 한 중앙 귀족 세력들은
            유교적 이념에 충실하고,,,,
            사회 질서를 확립하고 민생 안정을 내세워 금(金)나라와 사대 관계를 맺자고 하였고,,,,,

            묘청(妙淸)을 중심으로 한 지방 출신의 개혁세력들은
            보수적인 개경의 문벌 귀족 세력을 누르고 왕권을 강화하면서 자주적인 혁신 정치를 시행하려 하였고,,,,
            풍수 지리설을 내세워 서경으로 도읍을 옮기고,,,, 서경에 대화궁이라는 궁궐을 짓고,,,,
            금(金)나라를 정벌하자고 주장하였다.

            김부식(金富軾) 등의 반대로 묘청(妙淸)의 정치개혁과 금(金)나라 정벌론이 실패하게 되었다.
            개혁파의 묘청(妙淸) 세력은 서경 천도를 통한 정권 장악이 어렵게 되자.
            서경에서 나라의 이름을 대위국(大爲國)이라 하는 나라를 세우고 난을 일으켰다. --- 묘청(妙淸)의 난

            결과는
            김부식(金富軾)이 이끄는 고려의 정부군의 공격으로 약 1년 만에 진압되고 말았다.
            고려(高麗)는 금(金)나라와 사대관계를 맺었다.

            김부식(金富軾 : 1075년 ~ 1151년)은
            1145년 유명한 역사서적인 삼국사기를 완성한 고려 시대 학자이면서
            자주적인 사상보다는 사대주의적인 사상이 많은 정치관료 였다.

            금(金)나라는
            여진족(女眞族)의 아골타(阿骨打)가 1115년에 수도를 지금의 베이징으로 하여 금(金)나라를 건국했다.
            1234년 몽고족이 세운 원(元)나라의 공격을 받아 120년만에 멸망한다.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 : 1258년 설치 --- 1356년 회복

            1258년 원(元)나라의 군대가 지금의 함경도 영흥지역을 침략하였는데
            이때 같은 고려(高麗) 사람이 지방행정관을 죽이고 성문을 열어 원(元)나라에 투항해 버렸다.
            원(元)나라에서는
            이곳에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를 설치하고 고려(高麗)를 압박하고 간섭하기 시작했다.

            1269년에는 최탄이라는 사람이 반란을 일으킨 후,
            서경(지금의 평양)을 비롯한 북계 54성과 자비령 이북 서해도 6성을 원(元)나라에 바쳤다.
            원(元)나라는 서경을 동녕부로 개칭하여 자국 영토로 편입시켰다.

            약 100년간 유지 되다가,,,,,,,1356년 ( 고려 공민왕 5년 )
            원(元)나라의 힘이 약해진 틈을 타서 고려군은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를 공격하여 함락시킨다.
            이때부터 고려(高麗)는 원(元)에게 빼앗긴 평안도와 함경도 일대의 땅을 회복하였다.


          최영(崔瑩)의 요동 정벌론(遼東 征伐論)  vs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威化島 回軍) --- ( 1388 년 )

            1368년 중국 남쪽지역을 평정한 주원장(朱元璋)이 명(明)나라을 건국하면서,
            쇠퇴해진 몽고족의 원(元)나라를 공격하여 중국에서 멀리 북쪽의 몽골고원으로 물러나게 한다.

            이렇게 원(元)나라를 물리치고 중국을 차지한 명(明)나라는
            고려(高麗)에게 옛날에 원(元)나라가 차지하였던 평안도와 함경도 지역의 땅을 반환해 달라고 한다.

            당시 고려(高麗)의 정권을 쥐고 있던 최영(崔瑩) 장군은  
            명(明)나라의 무리한 요구에 반발하여 요동(遼東)지역을 정벌할 것을 계획하게 되었다.

            1388년 10만의 군사로 요동정벌에 나섰던 이성계 장군이
            압록강의 위화도(威化島)에서 군사를 회군(回軍)하여 개성으로 되 돌아가서
            고려의 왕(王)을 우왕을 폐위되고 창왕으로 교체하였으며, 최영(崔瑩)을 처형하였다.
            이렇게 고려의 실제적인 권력을 쥐게 된 이성계는 1392년 고려를 멸하고 조선을 건국하였다.

            역사에는 만약이 없다지만
            이때 이성계가 요동(遼東)을 정벌하고 돌아와서 조선(朝鮮)을 세웠다면
            나약한 명(明)나라에서는 그 땅을 차지 할려고 하지 않았을 것이고
            지금도 요동(遼東) 땅은 한국의 땅이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조선(朝鮮) ( 1392년 ~ 1910년 ) 시대의 북벌론

          세종의 여진족 정벌과 4군 6진 설치 ( 1433 년 )

            1433년 ( 세종 15년 ) 북쪽의 여진족을 토벌하고
            평안도에는 최윤덕 장군이 4군을 설치하고,
            함경도에는 김종서 장군이 6진을 설치하여 우리나라의 영토를 확장하였다.
            이로써 우리의 영토가 압록강과 두만강을 경계로 하는 한반도로 설정되었다.


          청(淸)나라의 침입 --- 1627년 (정묘호란) & 1636년 (병자호란)

            남쪽의 일본의 침략을 받은 임진왜란(壬辰倭亂 : 1592년 ~ 1598년)의 상처가 채 아물기도 전에
            이번에는 북쪽의 청(淸)나라의 침략을 당하게 되었다.

            1616년 만주족(또는 여진족)인 <누르하치>가 만주지역을 통일하고 후금(後金)이라는 나라를 세웠다.

            만주에서 자리 잡은 후금(後金)은 중국의 남쪽에 있는 명(明)나라를 치고 싶었는데
            명(明)나라와의 전쟁을 위해서 한반도에 있는 조선(朝鮮)이 걱정되었다.
            조선(朝鮮)에서
            자신들이 명(明)나라를 치고 있는 사이에 자신들의 후방을 공격할 것이 염려되었던 것이다.

            조선(朝鮮)의 광해군( 光海君 --- 재위 : 1608년 ~ 1623년 )은
            북쪽에 있는 후금(후에 淸나라로 이름을 바꿈)과 남쪽의 명(明)나라 사이에 중립외교 정책을 썼는데
            인조(仁祖 --- 재위 1623년 ~ 1649년 )가 즉위한 후에
            조선(朝鮮)은 후금(後金)을 배척하고 명(明)나라와 친선 관계를 유지하였다.

            이에 자극 받은 후금(後金)에서는 1627년 3만의 군대를 이끌고 조선(朝鮮)을 침공해 왔다 (정묘호란).
            인조와 신하들은 강화도로 피난을 갔고
            후금(後金)과 형제 관계는 맺겠다는 조약을 맺은 후 전쟁을 마무리지었다.

            1636년 국호를 청(淸)나라로 바꾼 후금(後金)은 형제 관계가 아닌 군신 관계를 요구해 왔다.
            조선(朝鮮)이 이 요구를 거부하자
            청(淸)나라는 12만 군대를 이끌고 또 다시 조선(朝鮮)을 침략했다(병자호란).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인조(仁祖)는 서울을 버리고 남한산성으로 들어가 항전하다가 항복하게 된다.
            이때부터 조선(朝鮮)은 청(淸)나라와 군신 관계를 맺게 된 것이다.

            1644년 청(淸)나라는 명(明)나라 수도였던 뻬이징(北京)을 점령하고 청(淸)나라의 수도로 삼았다.


          효종(孝宗)의 북벌(北伐) 계획 ( 1659년 )

            병자호란에서 패배한 조선(朝鮮)은 은밀하게 국방 강화에 힘을 기울이면서
            청(淸)나라에게 복수할 생각으로 북벌(北伐)을 준비하고 있었다.

            효종 (孝宗 : 재위 1649년 ~ 1659 년 )이 즉위한 후로는 북벌(北伐)을 위한 준비를 착실히 하였다.
            효종은 주전파를 중용하여 군대를 대량 양성하고 성곽을 수리하는 등 북벌(北伐)을 준비했다.
            그러나 1659년 북벌(北伐)출병 직전에 41세의 젊은 나이의 효종이 갑자기 서거하자
            현실적으로 북벌(北伐)은 어렵다는 판단하에 계속 보류되다가,
            결국 실천에 옮기지는 못하였던 것이다.


        일본에 의한 간도(間島)의 지배권 상실 --- 1909년 간도협약 (間島協約)

          간도(間島)는 우리들이 보통 만주 지역이라고 말하는데
          이 지역 중에서도 특히 한국인이 많이 사는 지역으로 중국의 동북 3성( 요녕성, 흑룡강성, 길림성 ) 을 말한다.

          1712년 조선과 청은 양국의 국경선을 언급한 백두산 정계비를 세웠다.
          백두산 정계비에는 << 西爲鴨綠 東爲土門 >> 이라는 내용이 있는데,
          청(淸)과 조선(朝鮮)의 국경을 << 서쪽은 압록으로, 동쪽은 토문으로 한다 >> 는 내용이다.
          청(淸)이 '토문'을 두만강으로 해석하는 한편
          조선(朝鮮)은 이를 비석에서 더 가까운 쑹화강의 상류라고 주장했다.

          고종 때 한반도에 흉년이 들어 많은 사람이 몰래 간도(間島)로 이주했으며,
          1902년 간도(間島)에 사는 조선인들은 간도관리사 이범윤을 주축으로
          청나라와 조선의 지배를 받지 않고 자체적으로 이지역을 통제하였다.
          또 1910년 대한 제국이 일본 제국에 병합된 뒤에 많은 조선인이 간도(間島)로 이주하여 독립 운동을 벌였다.

          일본은 조선의 지배권을 놓고 청나라를 상대로 청일전쟁( 淸日戰爭 : 1894년 ~ 1895년 )을 벌리는데
          이 전쟁에서 승리함으로써 조선에 대한 청나라의 간섭을 벗어 날수 있었다.

          일본은 만주지역과 한반도 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놓고
          만주지역에서 러시아를 상대로 러일 전쟁( 露日戰爭 : 1904 년 ~ 1905 년 )을 벌리는데
          주변국들의 예상을 뒤엎고 승리하게 되어 만주 지역과 조선에서의 독점권을 휙득했다.

          러일 전쟁( 露日戰爭)의 승리로 1906년 4월 일본은 간도(間島)를 점령하였다.
          일본은 만주철도의 관리권을 갖고,,, 청나라는 간도의 영유권을 갖는다는 조건의 간도 협약(間島協約)을
          1909년에 청나라와 일본 사이에 체결되었다.

          간도 협약(間島協約)은 일본이 1905년 을사조약으로 조선의 외교권을 강탈한 상태에서
          1909년 9월 4일 청나라와 체결한 조약이다.
          경부선에 대한 철도부설권 등을 일본이 가져가는 대신에,
          청나라에게는 조선의 영토인 간도(間島)에 대한 주권을 넘기는 내용의 조약이었다.

          1909년 간도협약 (間島協約) 체결당시 동간도(東間島)에만 한국인 9만여명이 살고 있었다고 한다.

          일본에서 당시에 발행된 지도에는
          간도협약(間島協約) 체결 전에는 조선의 영토로 나오던 간도(間島)가,
          간도협약(間島協約) 체결 후에는 청나라 영토로 되어 있다.

          1931년 일제는 만주에 만주국(滿洲國)을 세웠는데,
          간도는 << 간도성 >>이라는 행정 구역으로 있었고 << 옌지 >>가 중심 도시였다.

          제2차 세계 대전의 패전국 일본은 1952년 샌프란시스코 조약을 받아들여
          조선의 외교권을 강탈한 상태에서, 조선(朝鮮)을 대신해서 체결한 모든 조약들은 무효임을 선언함으로써,
          간도 협약(間島協約)을 비롯하여 1941년 이전에 맺은 조약을 모두 무효로 했기 때문에
          간도(間島)는 대한민국과 중국간 미해결된 영토분쟁 지역으로 아직도 남아있다.

          대한민국 사람 가운데 일부는 이 지역에 대한 중국의 일방적인 영유권을 인정하고 있지 않으며,
          언젠가는 해결해야 할 한중 영토분쟁 지역으로 생각하고 있다.
          간도(間島) 되찾기 운동을 벌리고 있는 단체의 웹사이트 는 www.gando.or.kr 이다.


        6.25 전쟁때 만주를 찾을 수 있었던 기회

          6.25 전쟁이 우리민족이 힘이 없었던 1950년이 아니고
          지금처럼 경제가 발전된 2000 년경에 일어 났다면 ,,,,,,,,,,

          이북과 이남이 또 다시 전쟁을 한다면 잃어 버린 땅을 찾기 위한 좋은 기회이다


        민족의 염원 ,,,, 앞으로 예상되는 기회

          반드시 찾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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