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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의 삼국통일을 도운 티베트(토번)

        618 년

          수(隋)나라의 마지막 임금이었던 수 양제 양광(隋 煬帝 -- 楊廣)와 이종사촌지간 이었던
          이연(李淵 : 재위 : 618∼626 년)이 쿠데타를 일으켜 장안을 수도로 삼고 당(唐)나라를 건국하였다.

          이연(李淵)은 선비(鮮卑)족이 건설한 수(隋)나라의 최상부 지배계층에 있었으므로,
          당(唐)나라의 임금 또한 선비(鮮卑)족이었다.


        626 년

          당 고조 이연(唐 高祖 李淵)의 둘째 아들이었던 이세민(李世民)이
          형인 황태자 이건성(李建成)을 살해하고, 당 고조에게 압력을 가하여 선위 형식을 통해 제위를 찬탈해
          아버지를 밀어내고 쿠데타로 황제의 자리에 오름 --- 현무문(玄武門)의 변 --- 당 태종 (唐 太宗)


        627 년

          백제의 무왕(武王)이 진평왕(眞平王)이 통치하고 있는 신라를 침범하였는데,
          당 태종 (唐 太宗)이 백제와 신라의 화친을 권유했으므로
          백제의 무왕(武王)은 신라를 공격하는 것을 중지하였다.


        629 년

          신라의 진평왕(眞平王)은
          당(唐)나라가 당 태종 (唐 太宗) 이세민(李世民)의 등장과 함께 급격하게 성장하고 있으므로,,,,
          고구려의 영류왕(榮留王)은 당나라와의 전쟁준비로 신라와의 접경지역에 군사를 집중시킬수 없는 것을 간파하고
          김유신(金庾信)으로 하여금 고구려를 침공하여 낭비성(娘臂城)을 탈취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첫번째 전투에서 고구려군에게 크게 패한 신라군은 사기가 꺾인 채 싸울 의지마저 잃고 말았다.
          이때 김유신(金庾信)은 혈혈단신으로 적진으로 뛰어들어 고구려 진영을 누비며 적을 교란시킨 후
          순식간에 고구려 장수의 목을 베어 가지고 돌아왔다.
          이 모습을 보고 기세가 오른 신라군은 앞으로 진격하여 고구려 군사들을 물리치고 낭비성(娘臂城)점령하였다.
          고구려는 몇 번에 걸쳐 반격을 가했지만 당(唐)나라의 침입을 우려하여 적극적으로 나서지는 않았다.


        630 년

          당 태종 (唐 太宗) 이세민(李世民)은 동돌궐과 중앙아시아를 정벌하여 영토를 2배로 넓혔다.

          티베트의 <남리송첸> 왕이 죽고, 그의 아들 <송첸캄포> 왕 ( 재위 : 630년 ~ 650년)이 즉위하였다.
          티베트의 왕실은 중국 북부지역에서 이주한 선비(鮮卑)족의 탁발부 출신이었다.


        631 년

          당 태종 (唐 太宗)에 의한 당나라세력이 급성장하는것에 자극을 받은 고구려의 영류왕(榮留王)은
          당(唐)나라의 침략에 대비하여 부여성에서 발해에 이르는 장성인 천리장성을 축조하기 시작했다.
          이 작업의 총책임자는 연태조( 연개소문의 아버지 )였다.
          천리장성은 16년의 작업끝에 646년에 완공하게 된다.


        632년

          신라의 진평왕(眞平王)이 아들이 없이 죽자
          화백회의에서 진평왕(眞平王)의 딸인 덕만(德曼)을 왕으로 추대하였다.
          신라 최초의 여왕인 선덕여왕(善德女王 -- 재위: 632년~647년)이 등극하였다.


        633년

          티베트의 <송첸캄포> 왕은 <스키타이>를 평정하고, 수도를 <라사>로 정하고
          강력한 티베트(토번) 왕조를 열었다.


        634 년

          신라 최대의 사찰이었던 황룡사(皇龍寺) 바로 옆에
          분황사(芬皇寺)를 창건하여 국민들에게 호국사상을 가르쳤다.

          주변의 9개 국가(민족)들이 신라(新羅)를 섬길 것이라는 염원을 가지고 황룡사(皇龍寺)에 9층 목탑을 건립하였다.
          황룡사 9층 목탑(皇龍寺 九層 木塔) 에서 말하는 9개 주변국은 다음과 같다.
          1층 --- 일본(日本),    2층 --- 중화(中華),    3층 --- 오월(吳越),
          4층 --- 탁라(托羅),    5층 --- 응유(鷹遊),    6층 --- 말갈(靺鞨),
          7층 --- 거란(契丹),    8층 --- 여진(女眞),    9층 --- 예맥(穢貊)


        635 년

          당(唐)나라를 건국한 당 고조 이연(唐 高祖 李淵)이 70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636 년

          티베트의 <송첸캄포> 왕은 당 태종(唐 太宗) 이세민(李世民)에게
          당(唐)나라의 황녀를 왕비로 맞이하고자 사자를 보냈지만 거절당했다.
          그래서 티베트에서는 20만의 군사를 일으켜, 당(唐)의 속국이던 <토욕혼>을 정벌하였다.

          선덕여왕(善德女王 -- 재위: 632년~647년)때 백제의 군대가 경주 인근 지역인 여근곡으로 쳐들어 왔으나
          신라에서는 알천, 필탄을 보내 이를 무찔렀다.


        638 년

          고구려의 영류왕(榮留王)은 군사를 동원하여 신라의 북쪽 변경의 요지인 칠중성(七重城)을 공격하였으나,
          신라의 필사적인 반격으로 패배하여 퇴각하였다.

          백제의 무왕(武王-- 재위: 600년 ~ 641년 /서동 )은
          신라 진평왕(眞平王)의 셋째 딸인 선화공주(善花公主)와 결혼하였는데, ---- 서동요(薯童謠)
          왕비가 된 선화공주(善花公主)가 전라북도 익산에 미륵사(彌勒寺)를 창건하도록 했는데
          이때 미륵사(彌勒寺)가 완공되었다.


        640 년

          신라에서는 귀족 자제들을 당(唐)나라에 유학을 보냈다.

          당 태종 (唐 太宗)이 고구려의 영류왕(榮留王)에게 사신을 보내에
          고구려 왕태자인 < 고환권(高桓權) > 을 당나라의 수도인 장안(長安)에 입조 할것을 요구하였다.
          고구려에서는 당(唐)나라와의 관계를 고려하여 이 요구를 들어 주었다.


        641년

          당 태종 (唐 太宗)은 고구려 왕태자의 당(唐)나라 예방에 대한 답방으로 < 진대덕 >을 고구려에 보낸다고 했다.
          <진대덕>은 고구려에 들어와 요수로부터 평양성에 이르기까지
          고구려의 지리를 자세히 관찰하는 것은 물론, 각 성에 배치된 군사력까지 면밀하게 조사하였다.
          당(唐)나라에 귀국한 <진대덕>은 당 태종 (唐 太宗)에게 고구려를 칠 것을 간언하였다.

          백제에서는 무왕(武王-- 재위: 600년 ~ 641년)이 죽고
          맏아들이었던 의자왕(義慈王 -- 재위: 641년~660년)이 즉위하였다.

          티베트의 요청에 따라 당 태종(唐 太宗) 이세민(李世民)은 할수 없이 조카딸인 문성공주를 티베트로 보냈다.
          티베트의 <송첸캄포> 왕의 왕비가 된 문성공주( 文成公主 )는
          중국의 불교를 전파하고,,, 비단 제작, 종이 제조,,, 등 각종 중국의 발전된 문화를 티베트에 전달하여
          티베트(토번)의 발전에 위대한 공헌을 하였다.
          지금도 문성공주( 文成公主 )는 티베트인들이 가장 숭상하는 인물이다.


        642 년

          당(唐)나라의 군대가 고구려를 침략하였으나 고구려의 <연개소문(淵蓋蘇文)> 장군이 막아냈다.

          고구려 조정에서는 당나라에 대한 강경파와 온건파가 다투게 되었는데,
          영류왕(榮留王)을 포함한 온건파들이 천리장성 축성 작업을 중단하고, 연개소문을 죽여야 한다고 의견을 모았는데,
          이것을 눈치 첸 연개소문은 영류왕(榮留王)을 비롯한 온건파를 척결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천리장성으로 떠나는 열병식에 조정 신하들을 대거 초청한 뒤 모두 참살하였다.
          군사를 이끌고 왕궁으로 쳐들어가서 영류왕(榮留王-- 재위 : 618년 ~ 642년)을 시해하고,,,,
          영류왕(榮留王)의 조카인 보장왕(寶臧王 -- 재위 : 642년~668년)을 옹립하여 왕으로 추대하였다.
          쿠데타에 성공한 연개소문(淵蓋蘇文)은 모든 실권을 쥐게 되었다.

          백제의 왕이 된 의자왕(義慈王)은
          친히 군사를 이끌고 신라를 공격하여 미후성(獼猴城) 등 40여 성을 빼앗았고,
          고구려와 연합하여 신라가 차지 하고 있는 당(唐)나라와의 교통로인 당항성을 빼앗았다.
          그리고 백제의 장군 윤충(允忠)이 신라의 전략요충지인 대야성(大耶城 -- 경상남도 합천)을 함락하여
          선덕여왕(善德女王)이 통치하고 있는 신라를 궁지로 몰았다.

          위기를 느낀 신라의 선덕여왕(善德女王)은
          김춘추 ( 태종무열왕 -太宗武烈王 - 재위 : 654년~661년 )를 고구려에 사신으로 보낸다.
          김춘추가 고구려로 들어가 연개소문(淵蓋蘇文)을 만나 군사원조를 요청했을 때
          고구려는 본래 자신들의 땅이었던 죽령 서북지방을 돌려주면 신라를 돕겠다고 하면서
          김춘추를 잡아 가두어 버렸다.
          김춘추는 고구려에 붙잡혀 갇혀 있다가 간신히 탈출하였다.

          백제의 의자왕(義慈王)은 당 태종(唐 太宗) 이세민(李世民)에게 사신을 보내
          당(唐)나라와 연합하여 고구려를 치기를 원한다고 했다.


        643 년

          백제의 의자왕(義慈王)은 고구려와 화친하여 신라가 차지하고 있는 당항성(黨項城)을 빼앗아
          신라가 당(唐)나라로 가는 길을 막으려 시도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위기의식을 느낀 신라에서는 당(唐)나라에 구원을 요청하였는데,,,
          당 태종(唐 太宗)은 고구려와 백제에 사신을 보내 신라에 대한 공격을 멈추라고 요구하였지만,
          고구려와 백제는 당(唐)나라의 요구를 거절하였다.
          고구려의 연개소문(淵蓋蘇文)은 당나라 사신을 잡아 가두어 버렸다.


        644 년

          당(唐)나라의 사신을 잡아 가두어 버린데 화가 난 당 태종 (唐 太宗)은
          약 30만 명에 달하는 대규모 원정군을 편성하고, 총사령관으로 이세적(李世勣)을 임명하여,
          당 태종 (唐 太宗) 이세민(李世民)이 직접 참가하여 고구려를 공격하였다.

          이세적(李世勣)의 육군은 개모성(蓋牟城)을 함락시키고,,,
          장량(張亮)의 수군은 비사성(卑沙城)을 함락시키는 등의 전과를 올렸다.


        645 년

          당군은 태종이 직접 독려하는 가운데 요동성을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백암성(白巖城)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주변에서 당나라 군대가 함락시키지 못한 성(城)은 건안성(建安城), 오골성(烏骨城), 그리고 안시성(安市城)이었다.

          이때 실질적인 고구려의 실권자였던 연개소문이
          말갈군을 포함하여 15만 명의 군사를 내어 안시성(安市城) 구원을 위해 출전시켰지만,
          고연수(高延壽)와 고혜진(高惠眞)의 고구려 군대는
          당 태종의 군대에게 포위되어 항복하고 만다 ------ 주필산(駐蹕山) 전투

          당 태종이 직접 지휘하는 대규모 군대가 안시성(安市城)을 포위하여 공격하였으나
          고구려의 명장 <양만춘> 장군에게 처참하게 패하고 물러났다. ---- 안시성(安市城) 전투

          결국 당 태종은 철군하였다. ------------- 당 태종 (唐 太宗) 이세민(李世民)의 고구려 원정 실패

          당 태종 (唐 太宗)이 고구려를 침략하고 있었을때 신라에서는 원군을 징발하여 당(唐)나라 군대를 도왔다.


        646 년

          당(唐)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고구려에서는 승전축하연을 열었는데,
          티베트(토번)에서는 < 송첸캄포> 왕이 보낸 티베트의 재상<가르통첸>이 참석하였다.

          당 태종 (唐 太宗)에 의한 당나라 세력이 급성장하는 것에 자극을 받은 고구려의 영류왕(榮留王)은
          당(唐)나라의 침략에 대비하여 부여성에서 발해에 이르는 장성인 천리장성을 631년부터 축조하기 시작했는데
          16년의 작업끝에 완공하였다.


        647 년

          선덕여왕(善德女王)이 비담의 난을 토벌하던 도중에 서거하자
          선덕여왕(善德女王)의 4촌 동생인 승만(勝曼) 왕위를 계승하여
          진덕여왕(眞德女王 -- 재위: 647년~654년) 이 신라의 왕으로 추대 되었다.

          비담의 난이 평정되었지만
          백제가 신라의 내정이 내분으로 불안해진 틈을 타 신라를 침공하였고,
          신라의 김유신 장군도 백제의 지속적인 공격에 밀려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을때
          고구려까지 신라를 공격하여 신라는 진퇴양난의 신세가 되었다.


        648 년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를 견제하기 위해 필요한 군사 지원을 얻기 위해
          김춘추를 당(唐)나라에 사신으로 파견하였다.
          김 춘추는 당(唐)나라에 건너가 백제 정벌을 위한 군대를 요청해 당 태종으로부터 군사 지원을 약속받았다.

          진덕여왕(眞德女王)은 김유신(金庾信)으로 하여금 국방력을 증강시키는데 전력을 다 했다.


        649 년

          백제의 의자왕(義慈王)은 당나라와 고구려가 전쟁을 벌리고 있는 사이에
          신라의 7개 성을 공격하였으나 김유신(金庾信)에게 역습을 당하였다가 결국 다시 빼앗았다.

          당 태종 (唐 太宗) 이세민(李世民)이 51세 나이로 죽고
          9번째 아들인 당 고종 이치( 唐 高宗  李治 )가 중국 당(唐)나라의 제3대 황제가 되었다.
          당 고종 ( 唐 高宗 )이 즉위했을때
          신라의 진덕여왕(眞德女王)은 태평송을 써서 보내는 등 중국과 외교관계를 긴밀히 하였다.
          당 고종 ( 唐 高宗 )은 백제의 의자왕(義慈王)이 보낸 사신에게
          신라에서 빼앗은 7개 성을 돌려주라고 하니까 백제는 당(唐)과의 외교관게를 단절하고 독자노선을 걷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백제와 당의 외교관계는 멸망시까지 단절되었다.

          티베트의 <송첸캄포> 왕이 죽고 그의 손자인 <망송첸포>가 즉위하였다.
          망송첸포는 너무 어렸기 때문에 나라의 중요한 사안은 재상이었던 <가르통첸>이 처리하게 되었다.


        654 년

          진덕여왕(眞德女王)이 죽고
          김춘추 ( 태종무열왕 -太宗武烈王 - 재위 : 654년~661년 )가 신라의 왕위에 올랐다.
          태종무열왕은 강화된 왕권을 바탕으로 백제와 고구려를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측천무후(則天武后)가 당 고종 이치( 唐 高宗  李治 )의 황후가 되었다.


        655년

          백제의 의자왕(義慈王)은 고구려와 연합하여 신라의 북쪽 지방에 있는 33개의 성을 공격하여 빼았았다.
          신라는 당(唐)에 구원병을 요청하였다.

          원효(元曉)대사와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의 딸이었던 요석공주 (瑤石公主) 사이에
          설총(薛聰)이 태어났다.


        656 년

          측천무후(則天武后)는 황태자였던 이충(李忠)에게 여러 죄를 뒤집어 쒸워 폐위시키고,
          자신이 낳은 장남인 이홍(李弘 -- 당시 15세)을 황태자 자리에 앉혔다.


        659년

          당 고종 이치( 唐 高宗  李治 )는 설인귀(薛仁貴)를 총사령관으로 하여 고구려를 침략하였으나,
          횡산(橫山)에서 고구려 장군 온사문에게 패하여 당나라로 돌아갔다. --- 당 고종(唐 高宗)의 1차 고구려 원정 실패

          백제의 의자왕(義慈王)군대가 자주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이 통치하고 있는 신라의 국경 지역을 침범하자
          신라에서는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 -- 김춘추)의 둘째 아들인 김인문(金仁問)을
          당(唐)나라에 보내어 당(唐)나라의 원군을 요청하였다.


        660 년

          신라의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의 요청을 받아들인
          당 고종 이치( 唐 高宗 李治 )는 소정방(蘇定方)에게 13만명의 군대를 이끌고 바다를 건너 백제를 치게 하였고,
          신라(新羅)에서는 군사 5만명을 이끌고 김유신(金庾信)으로 하여금 백제를 협공하게 하였다.

          기벌포(伎伐浦)에서 당군의 상륙을 저지하려던 백제군은 대패하였고
          황산벌 전투에서 계백(階伯)장군이 5천의 결사대로 백제를 지켜보려했지만 결국 실패하여
          백제의 의자왕(義慈王 -- 재위: 641년~660년)은 신라와 당나라의 협공을 받아
          사비성(泗沘城)이 함락됨으로써 항복하고 백제는 멸망하였다.
          당(唐)나라 군대에 사로잡힌 의자왕(義慈王)과 태자 부여융(隆)은 당나라로 압송되었다.

          티베트의 재상 <가르통첸>은 둘째 아들 <가르친링>에게 군사를 주어
          당(唐)나라를 섬기고 있는 <토욕혼>을 공격하게 했다.


        661 년

          신라에서는 김춘추( 태종무열왕 -太宗武烈王)가 죽고 큰 아들인 문무왕(文武王)이 즉위하였다.

          신라와 당(唐)나라의 연합군은 고구려 평양성(平壤城)을 포위 공격하였다.
          당(唐)나라에서는 44만 명의 대군으로
          육지에서는 요동지역을 공격하였고, 압록강 일대까지 밀고 올라 왔다.
          해상으로는 소정방의 10만 대군을 태운 당나라 함대가 대동강을 타고 평양성을 포위하여 공격하였다.

          신라도 북상하여 고구려의 남쪽 지역을 공격 할려고 했다.
          그러나 백제 부흥군이 나타나 신라군을 공격하는 바람에 신라는 고구려를 공격하기 보다
          남쪽의 백제 부흥군과 싸워야 했다.
          신라는 백제의 부흥군대를 소탕하였다.

          원효(元曉)대사와 의상대사(義湘大師)가 당(唐)나라의 불교(佛敎)를 배우기 위해 유학길에 오르는데,
          원효(元曉)대사는 당항성(唐項城) 근처의 한 무덤에서 잠이 들었다.
          잠결에 목이 말라 달게 마신 물이 다음날 아침에 깨어나 보니 해골바가지에 담긴 더러운 물이었음을 알고
          세상 모든 것은 마음에서 온다는 < 일체유심조 >의 진리를 깨닫고 유학을 포기하고 ,,,,
          분황사(芬皇寺)에 머물면서 독자적으로 민중 속에 불교를 보급하기에 노력했다.
          의상대사(義湘大師)는 당(唐)나라에 들어가서 공부하여 화엄종(華嚴宗)을 열었다.


        662 년

          당(唐)나라에서는 방효태에게 20만명의 군사를 주어
          고구려 평양성(平壤城)을 포위 공격하고 있는 소정방(蘇定方)의 군대를 도와라고 했다.

          연개소문(淵蓋蘇文)은
          당나라 20만 대군의 군량미를 수송하는 신라군은 전투능력이 없으므로 걱정할 것이 없고,,,,
          방효태 군대를 격파하면,,, 소정방 군대는 고립무원이 되므로 전쟁을 이길수 있다고 판단하였다.

          연개소문(淵蓋蘇文)은 패수의 상류인 사수(蛇水)로 이동하여
          이곳에서 당나라의 20만 방효태 군대를 몰살시키는 전과를 올린다. ----- 사수 전투(蛇水戰鬪)

          사수 전투(蛇水戰鬪) 전투에서 지원병을 모두 잃게 되자,
          평양성을 공략하던 소정방(蘇定方)의 군대도 포위를 풀고 황급히 당(唐)나라로 퇴각하였다.
          이로써 당(唐)나라의 고구려 침략은 실패로 돌아 갔고,
          전쟁은 고구려의 승리로 끝났다. ----------- 당 고종 이치( 唐 高宗  李治 )의 2차 고구려 원정 실패


        663 년

          백제 왕족 복신(福信)과 승려 도침(道琛) 등이 의자왕의 아들로 당시 일본에 체류중이었던
          부여풍(夫餘豊)을 왕으로 삼아 주류성(周留城)을 근거지로 하여 백제 부흥 운동을 일으켰다.
          당(唐)나라 장수 유인궤(劉仁軌)가 수성하는 사비성을 포위 공격하다가 실패했으나,
          <<당과 신라가 백제 사람들을 다 죽이고 땅을 신라에 주기로 약속했으니 어차피 죽을 몸, 싸우기나 하자.>>
          라는 격문을 내걸고 일반의 호응 아래 수차례 나·당 연합군을 격파했고,
          옛 백제 북서 방면의 성 200여 개를 장악하는 데에 성공한다.

          그러나 백제 부흥운동은 내부의 권력 분쟁으로 와해되는데
          신라는 당(唐)나라와 이 시기를 놓치지 않고 서로 연합하여 백제부흥군대를 완전히 궤멸시켰다.

          당(唐)나라는 신라와의 합의 없이 일방적으로 신라를 계림대도독부(鷄林大都督府)로 만들고
          문무왕(文武王)을 계림대도독에 임명하여 신라의 독립성을 부정하려 하였다.

          백제를 완전히 멸망시킨 신라의 문무왕(文武王)은 고구려 공략에 나섰다.
          신라에서는 고구려의 평양 공격에 나선 소정방(蘇定方)의 당군에게 군량을 수송해 주었다.

          티베트(토번)의 군대는 < 토혼욕>을 공격하여 <토욕혼>을 완전히 멸망시켰다.
          <토욕혼>의 왕이었던 모용낙갈발(慕容諾曷鉢)은
          그의 아내 홍화공주(弘化公主 --- 당 태종 (唐 太宗) 이세민(李世民)의 딸)와 잔존 세력을 이끌고
          당(唐)나라 양주(凉州)로 피신했다.


        665 년

          당(唐)나라는 신라의 문무왕(文武王)에게
          당(唐)의 지원을 받아 웅진도독(熊津都督)이 된 부여융(夫餘隆)과 취리산(鷲利山)에서 화맹을 맺도록 강요했다.


        666 년

          고구려의 최고 실권자였던 연개소문(淵蓋蘇文)이 죽었다.
          연개소문(淵蓋蘇文)의 맏아들이었던 연남생(淵男生)이 대막리지 직위를 이어받았지만,
          동생인 연남건과 연남산은 형의 권력 독식에 불만을 품었다.

          연남건이 형인 연남생(淵男生)이 변방을 순행하는 사이 왕명을 빙자하여 연남생(淵男生)을 제거 할려고 했는데,
          눈치를 챈 연남생은 당(唐)나라로 탈출하여 투항하면서 원병을 청했다.

          고구려의 보장왕(寶臧王)은 연남건을 대막리지로 삼고 조정을 재편하였다.
          당 고종 이치( 唐 高宗 李治 )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연남생(淵男生)을 앞장세워
          설인귀(薛仁貴)를 총사령관으로 임명하여 고구려를 재침략하도록 하였다.
          당(唐)나라 군사들은 고구려의 군사를 격파하고 남소(南蘇)·목저(木底)·창암(蒼巖) 등 3성을 함락시켰다.
          사태가 심각해지자, 연개소문의 동생 연정토는 한반도 쪽의 12개 성을 가지고 신라에 투항해 버렸다.

          신라는 연정토가 투항한 고구려의 12개 성을 접수한후 계속 북쪽으로 고구려를 공격하였다.


        667 년

          당(唐)나라의 장군이었던 소정방(蘇定方)이 죽었다.

          당(唐)나라의 이세적(李世勣)이 이끄는 군대가 고구려의 수도 평양성을 공격하기 위해
          신라에서는 문무왕(文武王)이 직접 장군들을 이끌고 북으로 올라 갔지만
          당(唐)나라 군대가 고구려군에 패하여 후퇴하면서 신라의 군대도 남하하여 철군하였다.
          하지만 당(唐)나라 군대는 고구려의 여러 성과 마을이 함락하였다.

          티베트의 재상이었던 < 가르통첸 >이 사망하였다.
          티베트의 통치 권력은 <가르통첸>의 둘째 아들인 <가르친링>이 이어받아 티베트를 통치하였다.


        668 년

          당(唐)군은 평양성을 공격하여 포위하였고,
          신라의 군대도 평양성 공략을 당군과 함께하여 결국 고구려의 보장왕(寶臧王)의 항복을 받아내었다.
          당(唐)나라 군대는 항복한 보장왕(寶臧王)을 당(唐)나라로 압송해갔다.

          고구려 멸망 이후 당(唐)나라에서는
          고구려 수도 평양에 안동도호부를 설치하여 설인귀(薛仁貴)로 하여금 통치하게 하였다.


        669년

          당 고종(高宗)은 장군 설인귀(薛仁貴)를 하여금 티베트(토번)을 공격하게 했다.
          티베트를 통치하고 있는 <가르친링>의 토번 군대는
          칭하이 호(靑海湖) 남쪽의 대비천(大非川)에서 당(唐)나라 군대를 궤멸시켰다 --- 대비천 전투

          대비천(大非川) 전투에서 설인귀(薛仁貴)는 생포되었으나
          <가르친링>은 포로가 된 당(唐)나라 장수들을 훈계하고 당(唐)나라에 돌려보내 주었다.
          설인귀(薛仁貴)는 패전의 책임을 지고 평민으로 강등 되어 유배지로 보내어 졌다.

          티베트(토번)과 당(唐)나라 군대가 대비천(大非川)에서 싸워 티베트(토번)이 대승한 이 전쟁의 영향으로
          신라는 당(唐)나라와 전쟁에 국력을 집중시키는 한편,,,,,,,
          당(唐)나라는 신라와의 전쟁에 국력을 집중시킬수가 없었다.
          티베트(토번)가 신라의 삼국통일을 도운 것은 바로 대비천(大非川) 전투에서 승리였다.


        670년

          토번군은 당(唐)나라가 장악하고 있는 서역을 공격하여 대승을 거두었다.
          40년전인 (630년) 당 태종 (唐 太宗) 이세민(李世民)이 동돌궐과 중앙아시아를 정벌하여
          당(唐)나라가 서역의 주인공이 되었으나 40년만에 티베트(토번)에게 밀려나게 되었다.

          신라군 1만명과 고구려 왕족인 고연무가 이끈 고구려 유민군 1만명이 협동하여,
          압록강을 건너 요녕성의 봉황성(鳳凰城) 지역으로 진출하여
          당(唐)나라 군대에 소속된 말갈군을 공격하여 대승을 거두었다.
          이 사건이 나당 전쟁 ( 670년 ~ 676년 )의 시작이다

          당(唐)나라에서는 한족(漢族) 출신의 高侃(고간)과 말갈 출신의 이근행(李謹行)으로 하여금
          4만의 병력으로 고구려 부흥군이 장악하고 있는 고구려의 수도였던 평양성을 공격하게 하였다.
          4만의 당(唐)나라 군대는 평양의 安東도호부를 점령했던 고구려 부흥군을 밀어내고, 황해도로 남하했다.
          남쪽으로 밀려 내려온 고구려 부흥군을 신라에서는 金馬渚(금마저: 전북 익산)로 집단 이주시키고,
          고구려 마지막 왕이었던 보장왕의 서자 高安勝(고안승)을 고구려왕으로 책봉하여
          옛 백제 지역에 주둔하고 있는 당(唐)나라의 웅진도독부와
          옛 고구려 지역에 주둔하고 있는 당(唐)나라의 안동도호부를 고구려 유민들을 이용하여 견제하도록 했다.

          신라군은 옛 백제 지역을 공격하여
          당(唐)나라 주둔군과 웅진도독 부여융(扶餘隆 -- 백제의 왕족 출신)이 이끄는 백제군이 주둔하고 있는
          옛 백제 지역의 82개 성을 빼앗았다.
          신라의 공격으로 위기감을 느낀 唐의 주둔군과 백제 유민 2,000여 명이
          47척의 선박을 타고 왜(倭)국으로 탈출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10년전 ( 660년 ) 나당 연합군의 공격으로 나라를 잃게 된 백제의 백성들을
          신라에서는 이들의 힘을 이용하여 당(唐)나라 군대가 주둔하고 있는 웅진도독부를 공격하였고,
          당(唐)나라에서는 이들에게 對唐(대당) 적대행위를 하지 않고, 신라에 대해서 적대 행위를 하도록 부추켰다.


        671년

          신라의 김죽지(金竹旨) 장군이 熊津都督府(웅진도독부)에서 가까운 곳에 위치한
          가림성(加林城)에 주둔하고 있던 당군 1만여명을 선재공격하여
          당(唐)나라 주둔군과 당나라를 돕는 백제의 군대를 격파하였다.
          장수들을 포함하여 모두 5,300명을 참살하는 대승을 거두었고,
          마침내 신라의 군대는 당(唐)나라가 장악하고 있던 백제의 사비성을 함락하고
          당(唐)나라 군대를 백제땅에서 몰아 냄으로써 백제의 옛 땅에 대한 지배권을 완전히 장악하였다.

          1년전 (670년) 신라와 고구려 부흥군이 합동작전으로 빼앗은 安市城(안시성)을 고구려 부흥군이 지키고 있었는데,
          평양을 점령한 당나라 군대가 다시 安市城(안시성)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1년전 칭하이 호(靑海湖) 남쪽의 대비천(大非川)에서 티베트(토번)군대에게 대패한 설인귀(薛仁貴)는
          유배에서 풀려나 한반도에 재투입되었다.

          당(唐)나라에서는 설인귀(薛仁貴)에게 수군을 지휘하여 백제의 바다쪽을 공격하게 하고,
          육지 쪽에서는 당군과 말갈족으로 편성된 군대를 압록강을 건너 한반도 깊숙히 신라를 공격하게 했다.

          설인귀(薛仁貴)의 당(唐)나라 수군은 예성강 하구에서 신라 수군의 공격을 받아
          수송선 70여 척을 잃고 대패하였다.
          이렇게 설인귀(薛仁貴)의 당(唐)나라 수군이 신라 수군에게 격파당한 뒤 설인귀(薛仁貴)는 평양으로 퇴각하여
          평양의 안동도호부를 거점으로 삼아 계속 남하(南下)하면서 한강유역을 확보한 후,
          당(唐)나라와의 뱃길을 열어, 병력을 집중투입한다는 것이 당나라 설인귀(薛仁貴)의 기본적인 전략이었다.

          그러나 海路에 의한 兵站線(병참선) 확보에 실패한 당(唐)나라 군대는 더 이상 남하 (南下) 하지 못하고
          평양(안동도호부)에 주둔하고 있었다.
          지금까지 총 병력 2만의 안동도호부에
          671년 말갈병 4만명을 증원하였으며 총 6만명의 군대를 거느리게 되었다.

          당(唐)나라 군대가 남하(南下) 하지 못하고 평양(안동도호부)에 주둔하고 있는 1년동안
          신라에서는 군대를 재정비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참고 : 신라가 당(唐)나라와 싸우면서 세운 절 --- 사천왕사 (四天王寺)


        672 년

          티베트(토번)의 사절이 당(唐)나라의 수도인 장안(長安)에 도착하여 당(唐)과 평화협상을 진행했다

          지금까지 총 병력 6만의 안동도호부에
          672년 이근행(李謹行)이 이끄는 4만명의 병력을 지원 받아 평양의 안동도호부에는
          총 10만명의 당나라 군대가 주둔하고 있었다.

          이들은 평양 인근의 작은 성들을 공격하였는데
          이때 한시성(韓始城)과 마읍성(馬邑城)이 당나라 군대에 격파 당하였다.

          고구려 부흥군과 신라군이 연합하여 당나라 군대를 상대로 격렬한 전투를 벌렸다.
          쌍방 모두 엄청난 피해를 입으면서 당나라 군대를 물리쳤지만 신라군의 피해가 너무 심했다 --- 백빙산 전투

          당(唐)나라 군대도 후퇴하여 석문 (石門 -- 황해도 서흥) 지역에서 진을 치고,
          추격해 오는 신라군과 맞서 싸웠다.
          이 전투에서 신라군이 대패하면서 신라는 나당전쟁 개전 이래 최대의 위기를 맞는다 ---- 석문 전투

          석문(石門)전투에서 김유신이 자신의 아들인 김원술이 싸움터에서 도망쳐 돌아오자
          아들을 용서하지 않고 내보내 버린다.
          김유신은 김원술이 긍지높은 화랑의 명예에 먹칠을 한 이유로 김원술과 부자간의 연을 완전하게 끊어버렸다.
          김원술은 이후 다시는 김유신을 만나지 못하고 집에도 들어가지 못한 채
          산 속에 근신하는 등 비참한 삶을 살아야 했다.

          신라에서는 당군의 남하에 대비하여 경기도 광주(廣州)에 주장성(晝長城 -- 남한산성) 등을 축조했다.
          주장성(晝長城-- 남한산성)은 북한산성(北漢山城)과 함께 한강 유역을 방어하는 강력한 요새가 되었다.
          또 문무왕(文武王)은 당에 사신으로 파견하여 唐 조정의 요인들에게 예물을 주면서
          신라에 대한 적대감정을 누그러뜨리게 했다.


        673 년

          임진강 중류지역을 장악하고 있던 고구려 부흥군이 호로하(임진강)에서
          남하해 내려오고 있는 당(唐)나라 군대와 격렬한 전투를 벌였는데,
          고구려 부흥군이 임진강의 요새에서 唐의 대군에 포위되어 수천 명이 포로가 되는 등
          당(唐)나라 이근행(李謹行)이 이끄는 군대에게 크게 패했는데,
          살아 남은 군대는 신라로 달아 나고,,, 고구려 부흥군은 완전히 해체되었다. --- 호로하(임진강) 전투

          김유신 (金庾信) 장군이 79세 나이로 죽었다.

          신라는 당(唐)나라 군대의 남하를 막기 위해 요충지마다 성곽을 건설하고
          당군에 대비한 방어력을 대폭 증강시켰으나,
          당(唐)나라 군대는 임진강을 남하하여 경기도 고양지역이었던 왕봉하(王逢河) 까지 남하했고,
          또 당(唐)나라 군대는 예성강 중류에 위치한 우잠성(牛岑城 -- 황해도 금천)을 공격했고,,,
          또 당(唐)나라 군대는 동자성(童子城 --- 경기도 김포시 통진) 을 공격하였다.

          신라는 남하하는 당(唐)나라 군대에 공세를 막는데 전력을 다하고 있었다.
          이런 바람앞에 등불 같은 위급한 시기에 신라를 도와준 세력이 있었다 --- 바로 티베트(토번)이었다.

          티베트(토번)이 장악하고 있던 서돌궐의 부족들이 당(唐)를 공격하였다.
          당(唐)나라는 소정방(蘇定方)을 파견하여 급한 불을 꺼야 했다.
          이때부터 당나라와 티베트가 휴전협상이 성립될때 까지 ( 674년 ~ 675년 까지 )
          당(唐)나라는 신라에 대한 공세를 늦추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시기에 신라는 전열을 정비하고 앞으로 있을 당唐)과의 전쟁준비를 철저히 했다.


        674 년

          당 고종 이치( 唐 高宗 李治 )는 신라 왕인 문무왕(文武王)의 관직을 박탈하고
          문무왕(文武王)의 동생인 김인문(金仁問)을
          신라의 왕으로 임명하여 신라의 내분을 조장하면서 신라 정벌을 감행하였다.
          당(唐)나라에서는 이근행(李謹行)에게 20만 대군을 이끌고 신라를 침략하도록 하였다.

          처음에는 당(唐)나라의 대군에 밀려 전선이 상당히 밀려났지만
          신라는 격전을 거듭한 끝에 임진강 전선을 끝까지 사수하였다.
          당(唐)나라의 남하전략이 신라군의 강력한 방어 전술에 의해 막히게 되었다.


        675 년

          당(唐)나라에서는 문무왕의 관직을 박탈하고 김인문(金仁問)을 신라의 왕으로 임명하여
          劉仁軌(유인궤)로 하여금 김인문(金仁問)을 호위하여 신라 서라벌로 입성하라고 했다.
          측천무후의 명령을 받은 유인궤(劉仁軌)는 675년 2월에 임진강을 도하하여
          신라군이 주둔하고 있는 칠중성(七重城 ---경기도 파주군 적성면)을 대파하였다.

          이때 서라벌로 향하던 劉仁軌(유인궤)와 김인문(金仁問)은 갑자기 당나라의 수도 장안(長安)으로 돌아가고
          劉仁軌(유인궤)는 곧바로 티베트(토번)군대가 점령하고 있는 청해(靑海)지역으로 투입된다.
          이번에도 티베트가 신라를 도운 것이다.

          신라군의 방어 전술로
          신라를 쳐들어온 당나라의 이근행(李謹行) 20만 군대는 경기도 연천군 일대의 매초성(買肖城)에 주둔하고 있었다.

          당(唐)나라의 남하전략이 신라군의 강력한 방어 전술에 의해 막히게 되자,
          당(唐)나라에서는 해상작전과 병행하여 우선 한강유역을 장악하여
          매소성에 주둔하고 있는 당(唐)나라 주력군의 보급로 확보가 시급하였다.

          다급해진 당나라에서는 4년전 (671년) 수군을 이끌고 침공했다가 실패했던
          설인귀(薛仁貴)가 다시 당나라의 수군을 이끌고 쳐들어가서 주력군의 보급로를 확보하기 위해
          신라의 천성(泉城- 경기도 파주 일대로 추정)지역을 확보하도록 했다.

          신라의 수군 장수 김문훈(金文訓)은 설인귀(薛仁貴)가 이끄는 당나라 수군과 접전을 벌려
          적선 40여척을 노확하고 1,400여 명의 적의 수급을 베는 확실한 전과를 올렸다.
          천성 전투에서 당의 수군은 괴멸적인 타격을 입었고
          패배한 설인귀(薛仁貴)는 바다로 도망하여 당(唐)나라로 철수했다. ------ 천성(泉城) 전투

          신라를 쳐들어온 당나라의 이근행(李謹行) 20만 군대는 경기도 연천군 일대의 매초성(買肖城)에 주둔하고 있었다.
          천성 전투의 실패로 보급로를 확보하지 못한 당나라 군대는 고립되어 있었다.
          신라는 고립되어 있는 당나라 군대를 매초성( 경기도 양주 일대 )에서 격파하여 대승리를 함으로써
          나당 전쟁의 주도권을 장악하였다. -------------------------- 매초성(買肖城) 전투

          매초성(買肖城) 전투에서 패배한 이근행(李謹行)은 전마(戰馬) 3만여 필과 다수의 무기를 버리고 도주했다.
          이근행(李謹行)은 당나라의 수도 장안(長安)으로 돌아가자마자
          바로 티베트(토번)군대가 점령하고 있는 청해(靑海)지역으로 투입되었다.

          당군과 신라군은 그 후에도 크고 작은 전투를 18차례나 벌렸다.

          당(唐)나라 군대와 티베트 군대는 현재의 신강위구르自治區 남부지역에 해당하는 지역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리면서 서역의 4개 진(鎭)을 뺐었다가 빼았기다가 하는 전투를 계속하고 있었다.

          당 고종 이치( 唐 高宗 李治 )가 건강이 악화되어 황태자 이홍(李弘)에게 제위를 물려주려 생각하고 있었는데,
          측천무후(則天武后)는 황태자였던 이홍(李弘)이 총명하여 어머니인 자신의 말을 듣지 않을 것 같아서
          독약을 먹여 자신이 낳은 첫번째 아들인 황태자 이홍(李弘)을 죽여버린다.
          그리고 두번째 아들인 이현(李賢)이 황태자에 책봉되었다.
          이현(李賢) 역시 죽은 형 이홍(李弘) 못지않게 총명하였다.


        676 년

          금강 하구인 기벌포(伎伐浦 -- 충청남도 서천군 장항읍 일대) 앞바다에서
          설인귀(薛仁貴)가 이끄는 당나라 수군과 金施得(김시득)이 거느린 신라 수군 사이에 격전이 벌어졌다.
          唐의 함대는 금강 하류로 진입하여 육지로 올라갈려고 했지만,
          신라 함대에 포착되어 치열한 싸움이 벌어졌다.
          신라 함대는 첫 전투에서 불리했으나, 나머지 전투에서 이겨 당군 4,000여 명을 살상했다.
          이 전투에서도 신라군이 승리를 거두었고, 당나라는 더 이상 전쟁 수행의 의지를 상실했다. --- 기벌포 해전

          신라와 당(唐)나라가 벌린 7년간의 전쟁(나당 전쟁)은 끝이 났다. ----- 당 고종 (唐 高宗)의 신라 정벌 실패

          기벌포(伎伐浦) 해전이 신라와 당나라간에 치루어진 마지막 전쟁이었다
          이후 당나라는 티베트(토번)과의 전쟁에 전력하면서 신라를 다시 침범할 여유가 없었다.

          그러나 신라는 언제 쳐들어올지 모르는 당군에 대비해 계속 국방력을 증강시켜야 했다.

          티베트에서는 < 망쏭망쩬 > 왕이 죽고 <치두쏭찬> 왕이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른다.


        677 년

          기벌포(伎伐浦) 해전에서 패배한 당(唐)은 요동성에 있던 안동도호부를 요녕성으로 더 후퇴시켰다.
          옛 고구려의 왕이었던 보장왕(寶臧王)을 요동도독으로 임명한 데 이어 조선(朝鮮) 국왕으로 책봉했다.
          또한 당(唐)나라의 변경으로 끌고 갔던 고구려 유민 2만 8,000여 호를 요동에 재(再)이주시켰다.

          그러나 보장왕(寶臧王)은 反唐(반당) 활동을 기도하다가 발각되어 또 다시 귀양가게 되고,,,,
          고구려 유민들은 지금의 감숙성(甘肅省) 등 변경으로 분산 이주시켰다.

          티베트(토번)은 지금의 사천성 일대 임하진(臨河鎭)을 공격하였다.
          티베트(토번)의 공세는 날로 심해졌다.


        678 년

          티베트(토번)에서 내부 분열이 일어 났다.
          신흥 부흥세력과 군부 세력간의 권력다툼으로 서로간에 전쟁을 하였다.
          이때 당 고종 이치( 唐 高宗 李治 )는 티베트를 공격하기보다는 신라를 공격하는 것에 집착하였지만
          신하들의 반대로 티베트를 공격하기로 하였다.

          당(唐)나라는 18만 대군을 이끌고 티베트를 침공하기위해 청해(靑海)로 들어 갔지만
          <가르친링>이 이끄는 티베트(토번)군에게 전멸당하면서 대패하였다. --- 승풍령 전투


        680 년

          당(唐)나라의 황태자 이현(李賢)이 똑똑하여 정치적으로 영향력을 넓혀가니까
          위기감을 느낀 측천무후(則天武后)는 황태자였던 이현(李賢) 여색을 밝힌다고 모함하여 황태자에서 폐위시켰다.
          그리고 자신의 세번째 아들인 이현(李顯)을 새로이 황태자로 삼았다.
          새로 황태자가 된 이현(李顯)은 형들과 달리 유약하였고, 어머니인 측천무후(則天武后)의 말에 절대 순종했다.


        681 년

          신라에서는 문무왕(文武王)이 56세 나이로 죽고,
          큰 아들인 신문왕(神文王 : 재위: 681년 ~ 692년)이 즉위하였다.

          문무왕(文武王)이 죽은 후 유언에 따라 시체는 화장하였고,
          감은사(感恩寺) 동쪽 바다 대왕암(大王岩) 위에 장사하였다.
          자신의 사후 동해바다의 용이 되어 신라를 지키겠다고 유언했다는 전설이 있다.

          참고 : 문무왕(文武王)이 죽은 후 그의 업적을 기록한 문무왕릉비 ( 文武王陵碑 )

          당(唐) 고종은 신라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의 시호가 외람되게 당(唐) 태종(太宗)의 시호와 겹친다면서
          이의 개정을 요구했다.
          신라의 신문왕(神文王)은 단호하게 거부했다.
          신라는 계속 국방력 증강에 박차를 가하면서 당(唐)과의 전쟁을 준비하고 있었다.


        682 년

          설인귀(薛仁貴)의 당(唐)나라 군대는 東돌궐을 격파하였다.


        683 년

          당 고종 이치( 唐 高宗 李治 --- 재위 : 649년 ~ 683 년 )가 56세 나이로 죽고
          당 중종 이현(唐 中宗 李顯 --- 재위 : 683년 ~ 684년 / 705년 ~ 710 년 )이 황제가 되었다.
          이때 중국은 당 고종 ( 唐 高宗 )의 황후였던 측천무후(則天武后)가 모든 실권을 장악하고 나라를 통치하였다.


        684 년

          당나라 실권자였던 측천무후(則天武后)는 당 중종 이현(唐 中宗 李顯)을 폐위 시키고,
          자신의 막내아들인 이단(李旦)을 황제의 자리에 올리는데, 이 사람이 바로 당 예종 이단(唐睿宗 李旦)이다.
          측천무후(則天武后)는 당나라의 모든 실권을 장악하고 모든 정사를 직접 관장하였다.


        690 년

          측천무후(則天武后)는 당 예종 이단(唐睿宗 李旦)을 황제자리에서 폐위시키고 황태자로 강등시키면서
          자신이 직접 황제자리에 올랐다.
          도읍을 장안(長安)에서 신도 낙양(落陽)으로 천도하였다.


        692년

          신라에서는 신문왕(神文王 -- 재위: 681년 ~ 692년)이 죽고,,,
          효소왕(孝昭王 -- 재위: 692년 ~ 702년)이 즉위하였다.

          당나라는 서역의 지배권을 되찾기 위해 장군 왕효걸(王孝傑)에게
          티베트(토번)이 점령한 서역을 공격하게 하여 <가르친링>의 아우 <가르다고리>가 이끄는 토번군을 격파하고
          서역에 안서도호부를 부활시켰다.


        694 년

          당(唐)나라에서 신라의 왕으로까지 임명 받은 바 있는
          태종무열왕의 둘째 아들인 김인문(金仁問)은 당(唐)나라에서 죽었다.


        696 년

          당(唐)나라는 돌궐과 연합하여 40만 대군을 이끌고 다시 티베트를 공격하였으나,
          티베트의 영웅 < 가르친링 >이 이끄는 5만의 토번군에 또 다시 대패하였다. --- 소라한산(素羅汗山) 전투


        699년

          티베트의 < 치두쏭찬 > 왕은 <가르> 가문을 왕권 강화에 방해되는 걸림돌로 여겨
          반역죄를 뒤집어 씌우고 <가르> 일족들을 대대적으로 숙청했다.

          실권을 쥐고 있는 < 가르친링 >은 <치두쏭찬> 왕에게 대항하지 않고
          티베트(토번)을 위해서는 자신이 죽는게 최선이라 생각하여
          동생(가르첸바)과 아들(가르궁린)은 당나라에 보내 항복하도록 하고
          자신(가르친링)은 칭하이(靑海)호 근처에서 자결했다.


        705 년

          측천무후(則天武后 --- 재위 : 690년 ~ 705년)가 82세 나이로 죽자,,,,
          당 중종 이현(唐 中宗 李顯 --- 재위 : 683년 ~ 684년 / 705년 ~ 710 년 )이 다시 황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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