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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돌 (2)

      고인돌을 만든 시기 ( BC 3000 년 ~~ BC 200 년  )

        한국에서 고인돌이 만들어지기 시작한 시기는 신석기 말기와 청동기 시대 초기의 시기에 해당한다.
        비록 청동이지만 돌이나 나무로 만든 도구( 무기 / 농기구 / 생활용품 )를 쇠의 일종인 청동으로 만들어,
        생산성을 획기적으로 높이면서,,,, 사유 재산을 모으고,,,, 또 다른 지방을 침략하고,,,,,
        지배 계급이 형성되고,,,,,, 이러한 급격한 변화가 시작 되는 시기에 고인돌을 만들었던 것이다.

        즉 이 고인돌은 만들수 있었던 주인은
        그 지방에서 엄청난 부를 축적하고 있는 막강한 권력가라는 것을 알수 있다.

        즉 고인돌은
        신석기 시대의 마지막에서 청동기로 넘어 가면서 엄청난 사회적인 변혁기를 맞이 하면서
        고인돌이 만들어 지기 시작하였고
        또 다시 철기 시대를 맞이 하면서 또 다른 사회적 변혁기에 고인돌은 더 이상 만들어지지 않게 되었다.

        한국의 고인돌은 BC 3000 년 경부터 BC 200 년 경 까지에 만들어 진 것임을 알수 있다.
        시대적으로 보면 북쪽에서는 고조선 ( BC 2333년에서 BC 238 년까지 )시대에 해당하는 시기이고,,,
        남쪽에서는 삼한( 마한, 진한, 변한)의 부족국가 시대때에 만들어 진 것이다.

        BC 3000 년경 한반도에서 청동기가 시작하면서 고인돌은 만들어 지기 시작하였고,,,
        BC 200 년경 양질의 철(鐵)을 생산하면서 고인돌은 더 이상 만들어지지 않았다.

        그런데 청동기 문화에서 앞섰던 한국계 사람들이 중국으로 넘어가서 중국의 지배계층이 되는데,
        이들이 만든 철(鐵)의 제조 기술이 BC 400 년경부터 한국보다 앞서게 된다.

        당시 중국에서 철(鐵)의 제조 기술을 크게 발전 시킨 나라는
        주(周) 나라의 제후국으로 출발한 연(燕)나라
        ( BC 1100 년 ~ BC 221 년 )라고 볼수 있다.
        연(燕)나라 는 고조선과 가장 가까운 지역으로 중국의 북부지방을 차지하고 있었다.

        연(燕)나라 유적지에서 발굴된 철(鐵)의 제조 유적지에서 발굴된 유물들을 보면
        당시 가장 강성했던 진(秦) 나라보다도 오히려 훨씬 더 많은 철제품들을 생산했었고,
        중국 최초라고 하는 철갑옷도 이곳 연(燕)나라 유적지에서 발굴되었다.

        이렇게 철(鐵)의 제조 기술에서 앞선 중국은
        BC 400 년경에  중국의 연(燕)나라가 고조선 지역을 침략하였으며,

        BC 300 년경에  또 다시 중국의 연(燕)나라가 고조선의 중심부를 침략하였으며,

        BC 220 년경
        진시황(秦始皇) 이라는 사람이 나타나서 중국을 통일하고 진(秦)나라를 건설하였고,
        BC 200 년경에는 중국 한(漢)나라가 중국을 통일하고 고조선 지역을 침략하였다.
        BC 108 년 한(漢)나라가 고조선(古朝鮮) = 위만조선(衛滿朝鮮) 을 멸망 시키고
        고조선(古朝鮮)의 지역에 한사군(漢四郡)을 설치하였다.

        BC 300 년경 중국 북부 지역에서 강성해진 연(燕)나라의 진개(秦開)라는 장수가
        만리 장성을 넘어 고조선(古朝鮮)의 중심부인 요하(遼河)강 지역까지 침략해 들어 간적이 있었다.
        이때 고조선(古朝鮮)은 사실상 멸망의 단계에 들어 갔다고 볼수 있다.

        고조선(古朝鮮)의 멸망과 함께 고조선 지역에 살고 있었던
        흉노족, 말갈족, 선비족, 예족, 맥족 등이 한반도 남쪽으로 이동하게 되는데,
        이들이 한반도 남쪽의 청동기 시대의 토착 지배세력이었던 고조선과 삼한(마한, 진한, 변한)을 물리치고
        각각 세로운 강력한 철제 시대의 나라들인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 등을 건설하게 되면서
        강력한 왕권이 확보된 한반도에서는 더 이상 고인돌이 만들어지지 않게 된다.


      청동기 시대에서 철기 시대로 --- 이런 사람들이 역사에 등장하면서 고인돌은 만들어지지 않았다.

        박 혁거세 ( 朴 赫居世 : BC 69 년 ~ AD 4 년 )

          BC 69 년 진한(辰韓)땅에 여섯 마을의 촌장들이 모여서 국사를 의론 할 때
          나정(蘿井)이라는 우물 곁에서 번갯불이 솟아오르고 있었고,
          그 옆에는 하얀 말 한 마리가 한참 꿇어 엎드려 있다가 길게 소리쳐 울고는 하늘로 날아올라가 버렸다.
          촌장들이 그곳으로 몰려가봤더니 그 곳에는 자줏빛의 큰 알이 하나 놓여져 있었다.

          촌장들이 그 알을 조심스럽게 깨뜨려보니,
          그 알안에 생김새가 몹시 단정하고 아름다운 한 사내아이가 있었다.
          촌장들은 그 아이의 이름을 박 혁거세 ( 朴 赫居世 ) 라고 지었다.

          BC 57년 박 혁거세 ( 朴 赫居世 )는 나이 13세일때 6부의 촌장들의 추대를 받아
          서나벌(徐那伐)의 왕(王)으로 추대 되었다.

          BC 40년 박 혁거세 ( 朴 赫居世 )는 진한(辰韓)의 마지막 왕인 <태기왕> 과 삼랑진에서 싸워 이겼다.
          BC 37년 강원도 횡성군에 있는 태기산으로 숨어 있었던 < 태기왕 >을 살해했다.

          BC 39년(즉위 19년) 봄 정월에 변한(卞韓)이 나라를 바쳐 항복해 왔다
          BC 37년(즉위 21년) 수도 금성에 성을 쌓았으며
          BC 32년(즉위 26년)에 금성에 궁궐을 건설하여 나라의 기틀을 잡았다.
          BC 5년(즉위 53년)에 동옥저(東沃沮)의 사신이 와 말 20필을 바쳤다.

          AD 4년  박혁거세 (朴赫居世)는 73세의 나이로 죽게 되었다.
          그런데  박혁거세 (朴赫居世)의 무덤은 5개 있다. --  오릉(五陵) -- 시신을 5개로 나뉘어 장사 지냈음

          오릉(五陵) 은 신라 1대 박혁거세왕, 제2대 남해왕, 제3대 유리왕, 제5대 사파왕,
          그리고 박혁거세왕의 왕비인 알영왕비 릉(陵) 이라고 알려져 있음

          박혁거세 (朴赫居世) 거서간(居西干)이 죽은 후 서나벌(徐那伐)의 왕(王)은
          박혁거세 (朴赫居世)의 맏아들이었던 남해 차차웅 ( 南解 次次雄 )이 뒤를 이었다.


        석 탈해 ( 昔 脫解 ) 이사금 (尼師今)

          용성국(龍城國)의 왕이 왕비(王妃)를 맞아 임신후 알(卵)을 낳게되자,
          왕은 좋지 못한 일이라 하여 버리게 하였다. 이에 보물과 함께 비단에 싸서 궤짝에 넣어 바다에 띄워보냈다
          궤짝에 실린 탈해는 금관가야를 거쳐 계림(鷄林)동쪽 아진포(阿珍浦 : 오늘날 포항 )에 이르렀다.
          이때 한 노파에 의하여 건져지고 길러졌다.

          청년으로 성장하여 포항(토함산 근처)에서 경주로 이사 온 석탈해는
          경주 남산 끝자락에 위치한 좋은 터를 발견했는데, 그곳에는 이미 호공(瓠公)이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다.
          그래서 속임수로 집을 빼앗기 위해 몰래 호공(瓠公)의 집 주위에 땅을 파고 숫돌과 숯을 묻어 두고는,
          우리 조상은 본래 대장장이었고 이곳에서 살았었다고 말하면서 집을 내놓으라고 말했다.

          시비가 붙어 호공(瓠公)과 함께 임금(신라 2대 임금 : 남해왕)에게 가서 판결을 부탁하였는데,
          호공(瓠公)의 집 주위를 파 보니 석 탈해 ( 昔 脫解 )가 주장한 것 처럼 숯과 숫돌이 나와서
          마침내 석탈해는 호공(瓠公)의 집을 빼앗고 반월성(半月城)을 차지하게 되었다.

          반월성(半月城)은 신라의 궁궐터라고 알려져 있다.

          AD 8년 석 탈해 ( 昔 脫解 )는 박혁거세 (朴赫居世)의 맏아들로써 서나벌(徐那伐)의 왕(王)이 된
          남해 차차웅 ( 南解 次次雄 )의 딸과 결혼하여 임금의 사위가 되어
          서나벌(徐那伐) 나라의 정치에 적극적으로 참여 하였다.

          57년 유리왕(儒理王 : 서라벌의 3대 임금 )이 죽자 선왕(先王) 유리왕의 유언에 따라
          석탈해 ( 昔脫解 )가 신라의 4번째 임금의 자리인 왕위에 올랐다.
          그때 석탈해 ( 昔脫解 )의 나이는 62세였다.

          80년 우시산국(于尸山國), 거칠산국(居漆山國)을 멸하였다.
          80년 석 탈해 ( 昔 脫解 )왕이 세상을 떠나고 유리왕(儒理王)의 둘째 아들이 파사 이사금(婆娑 尼師今)이 되었다.

          여기서 생각해 볼 것은
          석탈해 ( 昔脫解 )가 왕이 될수 있었던 것은 그가 대장장이로써 철(鐵)을 생산할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당시에는 철(鐵)을 생산하고 그것으로 무기나 농기구를 만들수 있는 사람이 권력을 쥘수 있었던 것이다.


        김 알지( 金閼智 )

          AD 65년 석 탈해 ( 昔 脫解 ) 이사금 (尼師今)시절에
          밤에 금성 서쪽의 시림(始林)의 숲에서 닭 우는 소리를 들었다.
          날이 새기를 기다려 호공을 보내 살펴보게 하였더니,
          금빛이 나는 조그만 궤짝이 나뭇가지에 걸려 있고 흰 닭이 그 아래에서 울고 있었다.
          궤짝을 가져와 열어 보았더니 조그만 사내아기가 그 속에 있었다.

          석 탈해 ( 昔 脫解 )왕은
          아이의 이름을 알지(閼智)라 하고 금궤짝으로부터 나왔다고 성(性)을 김(金)이라 부르게 하였다.

          알지(閼智)는 세한(勢漢)을 낳고
          세한은 아도(阿道)를 낳고,
          아도는 수류(首留)를 낳고,
          수류는 욱보(郁甫)를 낳고,
          욱보는 구도(仇道)를 낳고,
          구도는 미추(味鄒)를 낳았다.

          이렇게 김알지( 金閼智 )로부터 6대에 내려온 후손 중에서 김미추(金味鄒)가 신라의 13번째 임금으로 등장한다.
          김(金)씨로써는 첫 번째 임금이 되는 셈이다.

          미추 이사금(味鄒 泥師今 : 재위 262 년 ~ 284 년) : 아버지 김(金)씨, 어머니 박씨(朴氏), 부인 석씨(昔氏)


        김 수로왕 ( 金 首露 王 )

          경남 김해 지역의 촌장들이 구지봉(龜旨峰)에 올라가서 하늘에 제사를 지낼때
          하늘로부터 붉은 보자기에 싸여진 금빛그릇이 내려왔는데,
          그 속에는 태양처럼 둥근 황금색의 알이 여섯개 있었다.

          12일이 지난 뒤 이 알에서 남아가 차례로 태어났는데,
          그 중 제일 먼저 나왔기 때문에 이름을 수로라 하였다고 한다.
          주민들은 수로를 가락국의 왕으로 모셨고, 다른 남아들은 각각 5가야의 왕이 되었다.

          AD 42년 김수로왕은 금관가야(가락국)을 세우고 나머지 다섯 가야를 통제하여 맹주로 등장했다.
          AD 158년 김수로왕은 죽었고 그 아들이 <거등왕>이 되어 뒤를 이었다.


        백제의 시조인 온조왕 (溫祚王 :  ? ~ AD 28 년)

          BC 19년 고구려를 건국한 고주몽 ( 高朱蒙)이 죽은 후
          유리(類利) 왕자 때문에 왕의 자리를 차지하지 못한 고주몽 ( 高朱蒙)의 두 번째 부인에게서 태어난
          비류(沸流)와 온조(溫祚) 형제는 한반도의 남쪽으로 내려오게 된다.

          BC 18년 온조왕(溫祚王)이 한강 하류의 하남위례성에 도읍을 정하고 백제(百濟)를 건국하였다.

          BC 16년 말갈이 침입해 왔지만, 백제에게 대패해 달아났다.
          BC 15년에는 동예와 동맹을 맺었다.
          BC 11년에는 말갈의 대대적인 공격을 온조왕은 잘 막아 내었다.
          BC  8년에는 동예의 국경에 목책을 세웠는데, 동예가 말갈과 함께 목책을 부수고 백제를 침략해 왔다.
          BC  4년에는 도읍을 위례성에서 한성으로 옮겼다.
          BC  1년에 말갈이 위례성을 쳐들어 왔지만 말갈의 추장이 생포되였다.

          AD 9 년 온조왕은 마한(馬韓)을 정복하고 백제의 땅을 넓혔다.

          AD 28년 온조왕은 죽었다.


        고주몽 ( 高 朱蒙 : BC 58 년 ~ BC 19 년 )

          우리나라 역사서 중 하나인 <삼국사기>에서 동명성왕(東明聖王)이라고 기록하고 있고,
          광개토 대왕 비문에서는 추모왕(鄒牟王)으로 기록되어져 있다.

          중국의 대부분의 문헌에서는 부여(夫餘)의 시조는 동명성왕이고, 고구려의 시조는 고주몽이라고 적고 있다.
          역사적으로는 부여(夫餘)의 시조인 동명성왕과 고구려의 시조인 고주몽은 다른 사람이 었을 것이다.
          하지만 부여(夫餘)와 고구려가 같이 사용되기도 하였으며,
          부여(夫餘)의 뒤를 이은 고구려 역시 부여(夫餘)의 시조를 자신의 시조로 삼았을 것이다.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 따르면
          고주몽의 아버지는 천제(天帝)의 아들이며 북부여의 왕인 해모수(解慕漱)였다.

          고주몽의 어머니인 하백(河伯)의 딸 유화부인(柳花夫人)이
          북부여의 왕인 해모수(解慕漱)와 정을 통한 뒤 집에서 쫓겨났다.
          동부여로 도망쳐온 유화부인은 태기가 있어 큰 알(卵)을 하나 낳았다.

          이 알(卵)에서 태어난 아이가 고주몽 ( 高朱蒙)이다.

          BC 37년 졸본(卒本)에 도읍을 정하고 고구려를 건국 하였다.
          BC 36년 비류국(沸流國) 송양왕(松壤王)의 항복을 받았다.
          BC 33년 태백산 동남쪽의 행인국(荇人國)을 쳐서 그 땅을 빼앗아 성읍(城邑)으로 삼았다
          BC 28년에는 북옥저를 멸망시켰다.
          BC 24년 동부여에서 어머니인 유화부인이 죽었다. 동부여의 금와왕이 후히 장례를 치러주었다.
          BC 19년 동부여에서 첫 부인 예씨(禮氏)와 왕자 유리(類利 : 뒤에 유리명왕)가 도망해 오므로 태자로 삼았다.

          BC 19년 9월 고구려를 건국한 동명성왕(東明聖王)왕은 죽고
          맏아들인 유리(類利)가 고구려의 왕의 자리에 오른다.

          참고
          많은 중국의 역사서에서 고구려가 BC 200 년경에 이미 존재 하고 있었다고 적고 있으므로
          이때의 고구려는 부여(夫餘) 국가 속의 고구려로 볼 수도 있다.


        해모수(解慕漱) -- 부여(夫餘  : BC 238년 ~ AD 494 년)의 건국

          한국의 역사책인 <삼국유사>에 따르면
          BC 59년에 해모수(解慕漱)가 북부여(北夫餘)를 건국했다고 하는데,
          이것은 중국의 여러 역사서에서 BC 200 년이전에 이미 중국의 북쪽에 부여(夫餘)가 있었다고 하기 때문에
          부여의 건국은 BC 300 년경에 중국 연(燕)나라의 고조선(古朝鮮)을 침략으로
          고조선은 요하강 유역을 떠나 동쪽의 쑹화강 쪽으로 이동하면서 멸망 하게 되는데,
          이때 고조선의 위성 국가였던 부여국이 차츰 세력을 확장해 나가면서 국가로 발전한 것이라고 볼수 있다.

          그래서 어떤 책에서는
          부여(夫餘 )의 건국 시기를 BC 238년 으로 보는 학자들도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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