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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시아와 교역한 신라 --- 처용가

      당(唐)나라의 황소의 난

        중국의 역사상 가장 자랑스럽게 여기는 당(唐) 나라 ( 618년 ~ 907년 ) 말기에
        권력을 쥐고 있는 환관들의 횡포로 백성들의 생활이 어려워지면서
        860년부터 각지에서 농민들의 반란이 일으나기 시작하였다.

        874년 지금의 산동성에서 황소(黃巢)는 농민들을 규합하여 반란을 일으켰는데
        당(唐)나라 전역에서 약탈을 자행하였고, 당(唐)나라의 수도인 장안까지 점령하였다.
        그후 다시 전력을 갖춘 당(唐)나라 정부군에게 밀려 동쪽으로 도망하다가
        884년 황소는 산동성에서 자결하였다.

        이때 반란 농민들은 당(唐)나라 전역에서 백성들을 무차별하게 살인하였고, 재산을 약탈하였다.
        이때 당나라 동부 해안지역에서 거주하면서 장사를 하고 있었던 페르시아에서 온 무슬림 상인들은
        살길을 찾아 이리저리 흩어졌다.
        다수는 중국 사회에 스며들어 회족의 선조가 되었고, 해상으로 탈출해 신라로 피신한 이들도 있었다.
        이때 신라로 탈출해온 사람이 처용일 가능성이 많다.

        황소의 난이 평정된 후 당(唐)나라는 20여년간 지탱하다가 결국 멸망하고 만다.


      최치원의 토황소격문

        최치원은 신라의 수도인 경주에서 857년 태어나서
        12세때 ( 868 년 ) 당나라로 유학을 떠났고
        19세때 ( 874 년 ) 당나라에서 과거에 급제하여 양저우 지방에서 벼슬을 하였다.
        이때 ( 874 년 ) 황소의 난이 일어났는데
        881년 황소에게 항복할 것을 종용하는 편지 형식의 격문을 지어 황소에게 전달하였다

        내용이 세련된 표현과 논리 정연한 설명으로 되어 있어서
        이 글로 최치원은 당나라에서 유명하게 되었다.

        최치원은 황소의 난이 끝난 884년 당나라에서 신라로 돌아와서 신라에서 벼슬을 하였다.


      페르시아 와의 교역

        경주 황남동 미추왕 ( 신라의 13번째 임금 : 재위 262년 ~ 284년 )릉에서 출토된 구슬 목걸이(보물 제634호)는
        당시 신라에서 제작된 것이 아니고 페르시아에서 제작된 것 이었다.
        여기에 새겨져 있는 인물도 한국 사람의 모습이 아니고 페르시아 사람의 모습이다.

        이것은 3세기에 벌써 신라와 페르시아와의 교역이 있었다는 증거이다.

        경북 칠곡군 송림사는 신라 진흥왕 5년 ( 544년 )에 중국에서 가져온 사리를 모시기 위해 세운 절인데
        이곳에 있는 오층전탑속에서 녹색의 유리병이 나왔다.
        이 유리병은 신라에서 만든 것이 아니고 페르시아에서 만든 제품인 것으로 밝혀졌다.

        불국사에 있는 석가탑은 신라 35대 경덕왕 ( 재위 742년 ~ 765년 ) 때 만들어졌는데
        이곳에서 발견된 유향(乳香)은
        신라에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고, 아라비아 반도 ( 페르시아 )에서 만들어진 것이라고 밝혀졌다.

        경주시 외동면에 신라 38대 원성왕(재위: 785년 ~ 798년) 능으로 추정되는 괘릉(掛陵) 앞에
        돌로 만들어진 신하 모습의 석상이 있는데 모습이 한국 사람이 아니고 이슬람 사람의 모습이다.

        경주시 안강읍에 신라 42대 흥덕왕 ( 재위 826년 ~ 836년 ) 릉에도
        페르시아 사람 모습의 무인 석상이 있다

        이것은 당시 ( 8세기 ~ 9세기 ) 페르시아와 신라의 관계가 깊음을 뜻한다.

        또 흥덕왕( 재위 826년 ~ 836년 )시대에는 부유층들의 페르시아 제품의 사치품들을 선호하여
        사회문제가 되어서 이를 규제하는 법령을 만들었다는 기록도 있다.


      처용가 (處容歌)

        서라벌 밝은 달밤에 밤 새도록 놀고 지내다가,
        들어와 잠자리를 보니 가랑이가 넷이어라.
        둘은 내 것이지만 둘은 누구의 것인가,
        본디 내 아내의 것이지만 빼앗긴 것을 어찌하리."


      처용 ( 處容 )

        우리나라의 역사책인 삼국유사에 따르면
        처용은 통일 신라 헌강왕( 재위 875년 ~ 885년 ) 시대인 879년경
        뱃길을 따라 개운포(현재 울산항)로 흘러들어 온 이방인이라고 적고 있다.

        중국의 당나라 말기인 874 년에 황소의 난이 일어났는데
        이때 분노한 반란 농민들은 잘사는 사람들을 무차별하게 살인하였고, 재산을 약탈하였다.
        당나라에서 거주하면서 장사를 하여 부를 축척한 페르시아 상인들이 난을 피해 신라로 들어 온 것이다.

        페르시아의 역사책인 < 쿠쉬나메 > 에서는
        페르시아 출신의 쿠쉬 장군이 중국 내 혼란으로 페르시아인들의 안전이 불안해지자
        신라로 망명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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